문해력이 강조되고 ‘책육아’가 각광받다 보니
책장이 벽을 빼곡히 두르고 있고
한쪽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있는 거실 풍경이
많아졌다.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TV가 놓여있고
맞은편에는 두 명 이서도 거뜬히 잘 수 있을법한
크고 푹신한 소파가 있는 전형적인 거실보다는
뭔가 교육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더 교육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집 거실에는 TV가 없다.
하지만 벽을 가득 메우는 책장도 없다.
인테리어 취향이 확고하고
제네시스 한대 가격 정도 거뜬히 태울만큼
내 취향을 반영한 집 꾸미기에 진심이었던 내게
책장으로 가득 찬 거실은,
너무 숨 막히게 답답했다.
아이의 교육에는 도움이 될 거 같았지만
내 정신 건강에는 이롭지 못했다.
거실에 소파와 TV를 두지 않은 이유는
사실
단순했다.
그런 거실에서는 내가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일어날 생각을 하질 않고,
딱히 뭘 보는 것도 아니면서
적막함이 싫어 하루종일 TV를 틀어놓기 때문이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나를 아이가 방해했을 때
아이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거실에는 변변한 책장 하나가 없다.
겉멋을 부리기에 적당한 시스템 선반에
있어 보이는 여행책 몇 권을 올려놓았을 뿐이다.
너무 아이 독서교육에 무심한가 싶어
창가 쪽에 2단 책장을 하나 두었다.
대부분의 경우 시각적으로 깔끔하도록
서랍 문을 닫아두었다.
TV가 없고, 큰 테이블은 있으나
책육아와는 동떨어진 거실이다.
심지어 TV는 없는 게 아니라
TV방에 고이 모셔져 있다.
어차피 미디어를 차단하는 건 불가능할 거 같아
이왕이면 눈건강을 위해 큰 화면으로 보라고,
그리고 화면과 소리가 크면 집안일하면서도
아이가 약속한 영상만을 보는지 관리가 쉬워
정해진 시간만큼 기꺼이 TV를 틀어준다.
아이의 문해력이니, 공부머리니, 그런 것보다
내 취향이 더 중요했고
지금도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지만
아이의 초등 입학을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생활에 대한 여러 책들을 찾아보면
공통적으로 독서를 강조하기에
한쪽 눈 질끈 감고 2단 서랍장 옆에
거대한 3단 회전책장을 하나 들였다.
아이 방에 있던 책들을 모조리 꺼내와
차곡차곡 넣었는데도 무려 3칸이 여전히 비었다.
그 흔한 전집 하나 없이 한 권 한 권 사모은
단행본으로 그 정도면 그래도 많다고 해야 할까?
내가 너무 아이 교육에 무심한 건 아니었나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지려던 중요한 순간에
아이 유치원 방학이 시작되어 시골에 내려갔다.
책은 잠자기 전에 20분 정도 읽는 걸로 끝!
책육아는 개뿔….
하루 종일 TV시청, 유튜브 보며 종이접기,
신나게 물놀이 아니면 곤충채집하며 빈둥대는
한량 생활에 만족하는 아이의 행복한 표정만큼이나
뱃살도 두둑하게 쌓여갔다.
TV시청시간도 급격히 늘었다.
아이의 TV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아이 말고는 TV 틀어놓는 사람이 없던 우리 집과 달리
할아버지 집에서는
하루 종일 TV 화면이 꺼지질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TV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TV가 있는 거실의 순기능을 발견했다.
함께 올림픽을 보며,
처음에는 ‘잘하는 팀 우리 팀’이라는 모토로
이기고 있는 나라를 응원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외치고
양궁, 탁구, 배드민턴 경기를 보며
경기규칙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우리 집 TV는 정규방송은 안 나오고
OTT 몇 개만 연결해 놓아서
우리 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도 스포츠 경기를 딱히 챙겨보지는 않아서
할아버지가 실시간으로 TV를 틀어놓지 않았다면
스포츠를 함께 보며
경기규칙이나,
승패에 상관없이 4년을 피땀 흘리며 준비한 선수들의 값진 노력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지 못했겠지?
또 한 번 다 같이 뉴스를 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옆에서 열심히 종이접기를 하던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엄마, 방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금 전 아나운서가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더운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한 참이었다. 고기압 두 개가
한 반도 위에 겹쳐 있어서라고.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기압은 따뜻한 공기야. 고기압이 한 개만 있어도 더운데 무려 몇 개가 우리나라 위에 있다고? “
“두 개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
“엄청 더워요.”
“그런 얘기야.”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건 것만 같은 고기압을
갑자기 설명하려니 버벅댈 수밖에. 맞는지 틀린 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최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면서 그건 또 왜 궁금한지….. 이번엔 정말 말문이 턱 막혔다.
방통위에서 두 명이서 공영방송 이사들을 뜨거운 불에 콩 볶아 먹듯 날치기로 통과시킨 걸 말하는 것이었다.
하…. 방송통신위원회라….
“원래는 여러 명이서 함께 의논하고 투표를 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건데,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단 둘이 모여가지고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대충 공영방송 이사들을 뽑아서 그게 적절한지 문제제기를 하는 거야. “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종이 접기에 몰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못했는데, 어차피 다시 물어봐도
달라질 거 같진 않으니 그냥 다시 종이 접기나 해야겠다 뭐 그런 느낌이랄까.
그리고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날,
택시를 타고 가는 데 아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아, 덥다. 그때 그거 뭐라고 했지? 뭐가 두 개가 겹쳐있어서 덥다고 그랬잖아.”
“고기압?”
“아, 고기압 둘 다 북한으로 날려 보내고 싶다.”
“응? 한반도는 작아서 북한으로 날려 보내도 여전히 더울 거야. 게다가 북한 사람들은 가난해서 에어컨도 못 트는데 더 힘들지.”
“북한은 처음에는 전쟁에서 이길 만큼 잘 살았는데 왜 가난해진 거야? “
“그게 말이지…..”
머릿속에서는 공산주의, 공산당, 독재, 세습, 부패
그런 단어들이 마구마구 튀어나와 얽히고설켜버렸다.
겨우 겨우 아이 눈높이에 맞게 단어 구슬을 꿰어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그럼 미국으로 보낼까? 미국은 가장 힘세고 잘 사는 나라니까 괜찮잖아. “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 고통을 떠넘기는 건 그래.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보내는 건? “
“태평양으로 보내자.”
“태평양으로 보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그거 지난번에 책에서 읽었잖아. 태풍이지. 무슨 태양이 태풍의 엄마라고 그랬잖아. 웃겨. 하하하.”
그게 왜 웃긴지만 아이만이 알 테지만,
어쨌든 이 주 전쯤 읽은 태풍 책까지 소환하며
대화는 끝이 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TV는 정말 거실에서 사라져야 하는,
불필요하고 해악한 물건일까?
만약 거실에 TV를 틀어놓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아이가 갑자기 고기압과 방송통신위원회에
관심을 갖고 질문하는 그런 상황이 찾아왔을까?
문해력을 위해서
독서만큼 중요하다고 언급되는 것이
바로 부모와의 양질의 대화이다.
거실에서 도란도란 함께 TV를 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이와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사물은 언제나 중립적이다.
문제는 그걸 바라보는 태도와 사용하는 방식일 뿐.
책육아가 뜬다고 해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취향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거실을 책으로 두르지 않아도
‘차고 넘치게 충분히‘ 책을 읽히지 못해도
함께 맛있는 간식 먹으며 TV를 봐도
아이는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를 조금씩
확장해 갈 수 있지 않을까.
독서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TV의 쓸모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나의 중심과 균형.
나는 육아의 정도를 논할 위인이 못 된다.
다만, 수많은 인플루언서들과 저명한 전문가들의
조언과 훈수 속에서 나와 아이에게 맞는 방향과 방법을 찾으려 부단히 고민하고 애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