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의 웃음버튼,
곤졸라, 이얼치얼
아빠 왈, 곤졸라는 대체 어느 나라 피자야?
혼자서 철저하게 비밀유지를 하며 다 쓴 일기장을
엄마 아빠한테 던져놓고는
수줍어하며 방으로 뛰어갔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어제부터 자꾸 ‘더울 땐 이얼치얼이지!‘라고 외쳐댄다.
제발 좀 기억해 줄래? 이열치열이라고 몇 번을 말하니.
우리 집 혁명가는 엄마 말을 들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아~ 이얼치얼?”
저건 백퍼 일부러 저러는 거다.
한대 쥐어박아 말아?
지난 토요일에 DMZ평화열차를 타고
임진강역에 다녀왔다.
아이가 자꾸,
“북한은 살기 좋아요 나빠요?”
“북한은 왜 가난해요?”
질문을 해대길래 도서관에서 책도 찾아두고
DMZ까지 가는 임시 운행 열차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파주까지 자차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경기 남부에서 파주까지 주말에 가려면
엄청난 교통 체증을 뚫고 가야만 했다.
그런데 DMZ까지 실어 날라 주는
특별한 기차가 있다니!
기차 여행 느낌도 나고 갬성이 쥑이지!
실제 열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기차가 아니라
지하철을 개조해서 운행하는 임시열차였지만
스쳐 지나가는 풍경 구경하며 다녀올 만했다.
무엇보다 가격도 인당 왕복 3000원이라니!
수원역 출발이 하필이면 9월부터 운행하는 바람에
그나마 가까운 광명역에서 타는 걸로 예매했다.
아까운 주차비 15,000원만 아니었다면
최고로 혜자스러운 여행이었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경기도 DMZ 평화열차 홈페이지
https://ggdmzpeacetrain.com/reservation/detail.html?product_no=12
평화열차가 운행하는 날에는
그 시간에 맞춰 도슨트 투어 시간도 조정된다.
아이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가는 만큼
전문가의 정확한 설명을 듣는 게 더 도움이 될 거 같아
미리 도슨트 투어 신청도 해두었다.
DMZ DOCENT TOUR 홈페이지
https://dmzdocent.com/
출발 당일,
광명역에 가서 모임 장소인 1번 맞이방으로 향했다.
명찰을 착용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니
Staff라고 쓰인 주황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보여
다가가니 예약자 이름 확인 후에 명찰 3개를 주었다.
그런데 명찰들이 조금씩 달랐다.
내가 받은 명찰처럼 숫자만 적혀 있는 것들도 있고
숫자 아래 이름까지 적혀있는 명찰들도 있었다.
기차를 타고 나서야 명찰이 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숫자만 있는 명찰을 착용한 사람들은 종착지가
임진강역이었고
이름까지 있는 명찰은 종착지가 도라산역임을
의미했다.
용산역과 일산역에서 손님들을 더 태우고
종착지를 향해 달렸다.
열차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간식보따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3000원짜리 티켓에 간식과 물 한 병이 포함이라니!
안 탈 이유가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워서
나중에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추위를 잘 타는 분이라면 겉옷 필수!!
갈 때는 아들을 꼭 껴안고
올 때는 남편 팔을 꼭 껴안은 채 덜덜 떨며 왔다.
요즘 종이 접기에 흠뻑 빠져있는 아들은
열차 탑승을 기다릴 때부터 종이접기를 시작해서
열차 타고 가는 내내 종이 접기에 몰두했다.
요즘은 종이접기 덕분에 아주 행복합니다~
임진강역에서 내려
임진각 관광 안내소까지 땡볕 속에 걸어가는데
온몸이 점점 땅에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관광 안내소 건물 일층에는 매점이 있고
2층에는 햄버거가게, 국수가게, 우동가게, 두부찌개 가게가 있었다.
얼음이 띄워진 시원한 김치말이국수 사진을 보자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돈까스와 김치말이 국수를 시켰는데
김치말이 국수를 입에 넣는 순간
정수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먹을 때는 그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다던 남편도
투어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더니
김치말이 국수가 또 먹고 싶다고 할 정도로
무더위에 최강이었다.
도슨트 투어 모임 시간에 맞추어
생생누리 1층으로 갔다.
더위에 지친 아들이 의자에 드러누운 채
이동 시간이 되어도 일어날 기미가 안보이자
스멀스멀 화가 치밀었다.
버럭 큰 소리가 나려는 순간
아들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스무 명 정도가 한 팀으로 움직였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아이가 한 번에 알아듣진 못했지만
엄마 아빠가 다시 한번 아이에게 설명해 주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 보였다.
정말 무더운 날씨였다.
어른들도 금세 지치고 쉽게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
고맙게도 투어 내내 열심히 따라다니고
집중해서 설명을 들었다.
그런 건 내가 또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칭찬해 준다.
청개구리 아들을 잘 조련할 수 있는 비법이랄까.
특히 6.25 전쟁 납북자 기념관에서는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님이
아이들을 설명 중간중간 참여시켜서 진행한 덕에
몰입도가 최고였다.
물론 빵빵하게 나오는 에어컨도 한몫했다.
투어 시작에 앞서 천장에 매달린 조형물이 무엇을
형상화했는지 질문하셨는데
아이가 조용히 ‘회오리바람 같은데?’ 라길래
대신 대답해 주었다.
해설사님이 아이를 앞으로 불러 손을 잡으며
보조 선생님 역할을 하면 되겠다고 칭찬해 주셔서
아이의 얼굴에 수줍음과 뿌듯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첫출발이 좋아서였는지 투어 내내 제일 앞에 서서
다른 집 아들들과 해설사님의 질문에 서로 대답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물론 형아 한 명이 너무 잘해서
판세는 애당초 기울어졌지만 끝까지 즐겁게 참여했다.
아빠는 오늘 투어의 목표를
비무장지대가 뭔지 각인시키는 걸로 세웠는지
틈만 나면 아이에게 비무장지대에 대해 설명했다.
최전방 수색대로서의 자부심인가?
“아빠가 말이야~“
아빠의 옛이야기를 들어주면 좋으련만
아들은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나는 연애시절부터 이미 남편의 군대썰을 수차례 들어왔다. 군대 얘기 싫어한다면서 왜 자꾸 하는지….
보초 설 때 멧돼지 가족이 더덕을 파헤치는 걸 봤다느니, 더덕을 캐다가 더덕구이를 해 먹었다느니, 네가 최전방을 아냐느니….
그래도 허리가 아파서 주사를 맞았음에도
마누라의 싸늘한 표정이 무서워 따라나선
불쌍한 남편을 위해 아들대신 끝까지 들어주었다.
곤돌라 탑승까지 마치고 4시가 다 돼서 해산했다.
서둘러 임진강역으로 걸어갔다.
계속 열차 안에서 인원 체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두고 떠나진 않을 것 같았지만
정해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렀다.
역으로 가는 길에 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
덥고 힘든 데다 무릎까지 쓰리고 아프니
서러웠나 보다.
역사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집으로 오는 기차에서
아빠 어깨에 기대어 내내 잠이 들었다.
너무 가성비 좋은, 알찬 투어였지만
제발 한 여름은 피해서 가시길….
내년에도 운행을 한다면
도라산역에 가서 북한땅이 보이는 전망대에 가보자고
아들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