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가지 않는날에는

by Jade

한국에 돌아온 지 2주째.

어젯밤부터 재채기가 나오고 목이 까슬까슬하더니

결국 감기에 걸린 듯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인후통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오늘 도서관에 가는 건 포기했다.

대신 거실 테이블에 영어책을 잔뜩 펼쳐놓고 노트에 유용한 표현을 적어갔다.

TV시청 시간을 다 쓰고 혼자 거실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으로 장난을 치고 있던 아들이 테이블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뭘 쓰고 있냐며 관심을 보였다. 엄마가 쓴 걸 한 번 읽어보라며 보챘다.

그러다 마법 천자문 책을 들고 오더니 드로잉북에 그림을 따라 그리고 대사도 적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더니 다시 TV가 보고 싶어 졌는지 노트와 한자 사전을 들고 왔다.

원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한자 10개를 적으면 TV쿠폰을 주는 것인데 도서관에 가지 않는 날엔 집에 있는 한자 사전에서 10개를 골라 적었다.

이왕 적는 거 예쁘게 써야 한다며 한 자 한 자 꾹 눌러서 정성껏 적어나갔다.

두 개 쓰고, 아이고 힘들다 엄살 한 번.

또 두 개 쓰고, 아이고 힘들다 소리 한 번.

아이를 빤히 쳐다봤더니,

"그래서 안 한다는 건 아니고"라고 말하며

다시 한자를 써나갔다.

결국 10개를 모두 쓰고 신나게 TV를 보러 간 아들.


얼마 전에 같은 동네 살고 있는 친구가 물었다.

정말 영어 학원 안 보낼 거냐고.

또래 여자아이를 키우는 그 친구는 영어학원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어서 나에게도 추천을 했다.

학원을 보냈더니 알아서 파닉스도 깨우치고 간단한 단어들은 수월하게 읽는다고 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OO는 영어 배우는 거 좋아하지?"

내 예상대로 친구 딸은 영어 배우는 것도 좋아하고 욕심도 있었다.

반면 우리 아들은 영어공부를 싫어하진 않지만

조금만 어려워도 금세 엄살을 부리며 힘들어한다.

하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한자는 어려울수록 더 좋아하고 시키지 않아도 멋있다며 알아서 쓴다.

그런 아이를 영어 학원에 보내는 게 맞을까?

하루에 한 장씩 영어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여러 번 반복한 단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아직 파닉스 규칙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학원에 보냈을 때 이 녀석의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사실 9주 동안 발리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영어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사이 귀가 이전보다 트였을 수도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경험했 던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덕분에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가.

몇 달간 아들을 지켜본 결과 마음을 먹었다.

느리게 가면 된다.

3학년때까지 천천히 매일 한 장씩 하다 보면

파닉스도 떼고, 쉬운 문장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겠나.

섣불리 학원에 보냈다가 영어에 질려버리면 곤란하다. 지금처럼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배워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친구가 말했다.

불안해서 흔들릴 법도 한데, 참 단단하다고.

아들의 고집이 어쩌면 나한테서 온 지도 모르겠다.

고집 있게, 내 갈 길을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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