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조에 있어 사실주의(Realism)란, 현실을 존중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예술 제작의 태도 또는 방법, 묘사하려는 대상을 양식화, 이상화, 추상화, 왜곡하는 방법과 대립하여 대상의 세부 특정까지 정확히 재현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주의의 본래 의미는 단순히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삼는 것을 뜻한다. 사실주의 미학을 최초로 선언한 화가는 쿠르베이다. 쿠르베는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자기 자신이 직접 체험한 당시 현실의 모습만을 꾸밈이나 미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리겠다는 예술의 의지에를 표명하며 시작되었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쿠르베와 더불어 도미에 그리고 장 프랑수아 밀레 등이 있다. 도미에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의 부량자 그리고 악덕 변호사, 부패한 정치가 등을 주제로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을 풍자하였다. 반면 밀레는 농촌을 배경으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산업화된 도시의 달리 순수함과 삶의 터전이자 만물이 살아가는 땅이 있는 농촌의 모습을 꾸밈없이 표현하였다.
<사신死神과 나무꾼/장프랑수아밀레/oil on canvas/1859/Ny Carlsberg Glyptotek, Copenhagen, Denmark>
해가 저물고 있는 저녁이다. 나무꾼은 종일 일을 한 후 모아 놓았던 가지 더미를 묶어 막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때 마침 지나가던 사신(死神)의 눈에 나무꾼이 들어오고 말았다. 사신은 나무꾼의 멱살을 잡고는 무조건 끌어당기고 있다. 갑자기 자신의 멱살을 잡는 사신의 손을 뿌리 칠 수 없던 나무꾼은 다리에 힘이 풀리어 망연자실 쓰러지고 만다. 그 사이 나무꾼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나뭇가지를 손으로 꼭 잡아 본다. 사신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말이다. 사신은 앙상한 뼈만 남아 있다. 살아있는 힘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푸석한 뼈는 죽음을 상징하기에 그지없다. 커다란 칼을 어깨에 메고 있으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머리까지 감출 수 있는 하얀 원피스(one-piece)를 입고 있다. 그의 앙상한 뼈는 발의 움직임과 같은 방향인 왼쪽 엉덩이 부분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나무꾼의 生이 이제 마감되었음을 알리는 모래시계가 사신이 어깨에 메고 있는 칼에 날개를 달고 얹혀있다. 그것은 마치 생애주기에서 느끼는 감정 (喜怒哀樂)은 순간이며 지나면 그만이라는 듯 말이다. 배경의 뒤편에는 집 지붕이 보인다. 아마도 나무꾼의 집인 것 같다. 조금만 걸어가면 가족의 사랑과 안락한 쉼터가 있는 집을 두고 나무꾼은 이제 生을 마감하게 된다. 집에서 나무꾼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상실감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놀라운 일인가? 그림 속 빛은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비추고 있다. 나무꾼의 집에서 시작하여 사신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삶이 시작되는 장소에서 마치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밀레가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죽음이란 언제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모르는 것이며 그것은 생명체에게는 꼭 겪어야 하는 삶의 과정이자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들이 모두 덧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이다.
<사신과 나무꾼 습작본/장프랑수아밀레/12.7cmx28.2cm/종이에 흑연/1859>
몇 주 전 이번 달 약 처방전을 받기 위해 대학병원에 들렀을 때 병원 안에 자리한 서점에서 <죽음의 에티켓/롤란드 슐츠 저/스노우폭스북스/2019>을 한 권 샀다. 책이 왜 눈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은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그 절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중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예의 바른 자세라고 말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정리된 것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다가오지 않을 불안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엔 현재라는 시간이 매우 아까운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직면한 이 시간에 충실하고 솔직한 감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솔직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미 그것을 경험? 해 보았기도 하였고, 스스로 선택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나 자신을 사랑해서라기 보다는나만을 바라보며 내가 지켜야 할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행위이다.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절대적 이기심이 있었다면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신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죽음은 신체의 죽음보다 더 가혹한 행위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스스로 괴롭히거나, 마녀사냥을 하듯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한 인간을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생명까지도 앗아가기도 한다. 쉽게 내 뱉은 한 마디 그리고 생각 없이 적었던 SNS의 댓글 등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았으면 한다.
죽음을 두려워할 시간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마지막 순간 눈을 감으며 세상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춰나아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적으로 이기적일 수 없는 엄마라는 자리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을 내게 주신 생명의 신과 부모님에게 감사함을 전해 본다.
농촌과 농부들의 모습이 가득한 그림으로 알려진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프랑스의 화가로 어릴 적 자신이 살던 마을의 사제들로부터 라틴어와 문학의 중요한 작품에 대해 공부하며 지식을 쌓았다. 1833년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프랑스의 남서부 도시인 셰르브루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이후 그는 그 지역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살롱전을 개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성공한 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48년 유대인의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을 그리면서 국가와 정부의 멸시와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가 출품했던 작품은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그 행방을 아는 이는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작품을 밀레 스스로 가져가 파기했다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다. 밀레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났으며, 그에게 있어 중요한 사실은 밀레의 그림이 19세기 후반의 전통주의로부터 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삭 줍기’와 같은 밀레의 작품은 사회주의자로부터는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주의자로부터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그의 작품들은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