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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e Sep 03. 2020

욕망(欲望)을 가진 당신에게.

낸시 랭(Nancy Lang)에 대하여

"당신에게 그림은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한다.
"그림은 저 자신입니다."


2020.8.22.-9.5. 까지 학동역 바로 앞에 자리한 갤러리 이유에서 낸시 랭의 개인전인 <Scarlet Fantasy 전>이 열리고 있다. 낸시 랭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아티스트이다. 방송과 예술계에서 획기적이며 그녀만의 독창성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그녀는 솔직한 (아니 정직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반면 매우 침착하고 신중하며 그리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며 상대의 감정상태에 대해 누구보다 빠르게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갤러리에 들러 이번 전시회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에게 빠져들지 않을 이가 누가 있을까?싶을 만큼 깊은 력(?)의 소유자이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은 'Taboo Yogini'이다. Taboo란 금기라는 의미이며 Yogini는 수행을 의미한다. 타부 요기니란 이중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기를 수행하다. 그리고 금기를 수행하여야 한다.라는 의미 말이다. 금기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금기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 낸시 랭. 이번 전시회의 작품에는 수많은 '꽃'들이 많이 등장한다. 온갖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으며 활짝 피어있었다. 꽃 몽오리는 보이지 않는 만개한 꽃들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강철의 무기와 차가운 기계 덩어리들.

그녀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아르데코의 여왕이었던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의 깊은 심연에 억누르고 있어야만 하던 비밀스러운 감정들이 폭풍처럼 밀려 나왔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다시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감정을 다 터뜨리기엔 아직 부족한 사람이었다. 아니 나의 아픔을  세상으로 토해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렘피카를 사랑하는 나는 그녀의 그림 속 감정이 없는 여인들의 눈동자와 살갗을 보며 그녀들은 어쩌다 얼어버린 대리석 같은 모습으로 액자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램피카와 당시의 여인들을 마주 했었다.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타마라 드 렘피카/35cmx27cm/oil on canvas/1929>

이번 전시회에 선 보인 낸시 랭의 작품이 그러했다. 금세 물을 뿌려 습기를 머금은 만개한 생명력 가득한 꽃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여인이었으며, 총부리와 차가운 기계 덩어리는 아직도 만연한 남성의 폭력성과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정의한 남성의 힘과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게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넓게는 전 세계적으로 성폭력, Revenge Porno,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폭력과 전쟁 등 수많은 메시지가 내재된 것이었다. 꽃들이 흘리는 눈물과 꽃의 대비는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이는 여성은 누구나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개체이며 여러 종류의 꽃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한 여성에게 물리적 힘을 이용하여 아직도 그저 자신의 길을 가려는 사회적 약자인 존재를 위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이번 작품들은 시대는 다르나 사회로부터  자신 즉 여성을 대변하는 렘피카와 낸시 랭이 닮은 모습이었다.

<Taboo Yogini-Scarlet 시리즈/낸시 랭/oil on canvas/2020>



그녀의 건담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오브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녀 자신이 어린 시절 마주하였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추억의 상징이다. 로봇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아이의 얼굴과 그 아이가 자라 욕망의 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작품은 그녀의 자화상과 같다. 자신만이 가진 달란트를 가진 꿈 꾸는 소녀였던 그녀에게 누가 로봇과 같은 갑옷을 입히게 하였을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이것은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낸시 랭과 같이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초기에는 자연과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본능적인 삶을 살았으나, 사회가 진화되면서 사회는 사회를 만든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인간이 사회를 만들며 내재된 욕망으로 인해 사회를 욕망 덩어리로 만들었다는 것이 더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와 소년의 이마 위에 자리한 별은 어린 시절 꿈꾸던 희망과 자신이 가진 달란트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상징이다. 이러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자라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를 욕망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Taboo Yogini - Dream시리즈/낸시 랭/72.7cmx53cm/Mixed media in canvas/2020>

낸시 랭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수한 모습의 동심을 꿈꾸는 소녀와 같았다. 필요에 의해  꼭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어른 아이.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길 바란다. 생각이 많은 아이 그리고 순수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지금의 모습에서 성장을 멈추어 준다면 그녀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빛나는 모습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처만큼 깊어지고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기에 성장하고 깊어졌다. 나는 그녀가 그러한 이유에서 더 이상의 성장이 멈추었으면 하는 은유의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크다. 나의 딸에게 있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상과 같았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보호복을 입은 채 주먹을 꼭 쥐고 있다.

낸시 랭이 사용하는 파피에 콜레란(Papier Colle) 종이 따위를 찢어 붙이는 기법으로 콜라주의 일종이다. 콜레란 풀로 붙인다는 뜻으로 이 기법을 최초로 사용한 이들이 바로 큐비즘의 대가인 브라크(작가의 브런치 글 참조)와 피카소이다. 큐비즘 (입체주의)의 마지막 단계인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 이들은 평면에 붓칠만을 하는 작업을 한 단계 끌어올려 종이와 이미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던 많은 인쇄물 등을 다시 이어 붙여 새로운 사유를 담는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었다. 이것은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미적 효과를 자아내는 기법을 고안한 것이었다. 이는 붓에 의한 재현 묘사보다 한층 현실감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견고한 화면 구성이 요구된다. 손으로 그려진 부분에서 물체가 떠오르지 않도록 마무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와 그림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되찾으려 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현대 미술이 처음으로 물체와 만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낸시 랭은 말한다. "작업을 하기 위한 준비는 너무도 즐거워요 하지만 그 자료들을 이어 붙이고 구도를 생각하며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요.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며 쪼개진 개체와 쓸모 없어진 것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이죠. 저의 손에 의해 그 생명의 의미와 존재가 달라지잖아요."



그래 맞다. 낸시 랭의 말처럼 생명의 탄생과 그 고통은 겪어 보지 않은 자들은 알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그러한 작업을 무엇을 위해 하고 있는지 그리고 고통을 감수하며 창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 시키는지를 말이다.


 <Taboo Yogini-Scarlet T1013/낸시 랭/116cmx91cm/oil on canvas/2020>

팅커벨이 되어 날아온 어린시절의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른의 나릍 바라보며 말하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너는 지금도 충분히 너 자신이며 내가 너를 이렇게 늘 지켜보고 있잖아."



전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누워 있었다. 상처없는 어른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꺼내어 놓을 용기가 있는 자와 그 반대편에 서서 관망하는 자. 나는 후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요즘 예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꺼내어 보고 있다. 1995년 작품인 데미무어와 게리 올드먼의  영화 '주홍글씨'는 금기된 사랑으로 인해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고 사는 여성의 이야기임을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화 속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으며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온갖 고문과 야유 속에서도 그녀가 흔들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주홍글씨를 가슴에서 뜯어내고 자유의 몸이 되어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과 사랑을 이루게 된다.  성적 욕망만이 그녀를 지배하였다면 그녀의 사랑이 아름다웠을까? 만약 그러했다면 유부녀가 바람난 흔한 이야기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이 아닌 진실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주홍글씨를 스스로 가슴에서 뜯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욕망으로 인해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것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여! 그대들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할 의미가 있을까?하는 위험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또한 간직하고 싶은 비밀은 영원히 지킬 것이며, 만약 들키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이 들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 또한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욕망을 위해서가 아닌 용기를 위해서 말이다.

 





https://m.youtube.com/watch?v=CwtrzMn1BzE

<Photograph - Ed Sheeran (cello/bass/violin cover by Simply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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