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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온우 9시간전

처음부터 임신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커리어가 아이를 가지는 것보다 중요했던 내가 임신을 결심하게 된 이유

학부시절 여성학에 눈을 떴던 나는 결혼, 임신, 육아가 사회적으로 여성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라 느꼈다. 여성은 내 아이와 남편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항상 무언가를 포기하고 잃고 견뎌야 했으니까. 20대의 시간 동안 지금의 남편인 현이와 끝도 없이 토론하고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던 주제였다.


수많은 고민 끝에 우리는 28살에 결혼을 했다. 그 후 나의 삶은 걱정과는 달리 과거와 똑같았고 오히려 더 행복했다. 20대 내내 현이와 동등한 성역할을 갖고자 노력했던 덕분에, 운 좋게도 좋은 가족들을 만난 덕분에 결혼을 했다고 여성으로서 강요받거나 포기해야 할 것이 있지 않았다. 집안일이라면 오히려 현이가 더 잘했고 결혼 전 요리를 남편이 도맡아 하기로 한 후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은퇴 후 외식업을 꿈꿀 정도로 양식, 일식 전문 과정을 밟으며 요리를 마스터한 전문 셰프가 되었으니까 :) 우리는 서로를 배려했고,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인풋과 자극, 행복감을 얻는 나를 현이가 이해해 준 덕에 결혼 후에도 혼자 여행도 꽤 많이 다닐 수 있었다.






임신은 결혼과는 다른 문제였다. 생체적인 구조부터 여성과 남성이 동등할 수가 없었다. 여성이 10개월 동안 아기를 품었고, 출산을 했으며, 모유를 먹인다면 아이를 낳고 나서도 늘 붙어있어야 했다. 보편적인 사회 통념상 육아휴직은 여성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에 출산휴가까지 붙인 1년 3개월 기간 동안 육아는 '엄마의 일'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회사 동료들에게 휴직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아이는 엄마의 껌딱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간혹 아빠가 아이를 봐주는 날에도 아이는 울면서 엄마만 찾는다고 했다. 그러기에 엄마는 복직을 하고 나서도 주양육자로서의 가장 큰 역할을 해나가야 했다. 나의 삶과 커리어가 중요했던 나에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어지는 이런 책임감과 무게감이, 그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남편 현이는 삼 남매 중 막내였고, 나도 부러울 정도로 형제간 우애가 좋았다. 자연스레 자신도 결혼을 하면 세 명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결혼 전부터 내가 임신 후기 에세이나 웹툰을 읽고 임신과 출산이 여성에게는 얼마나 고되고 죽음도 각오하고 마음먹어야 하는 일인지 이야기할 때마다 현이는 혹여 내가 겁을 먹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을 했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고 자녀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우리의 생각은 명백히 달랐다. 현이는 바로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아이를 셋을 낳으려면 젊을 때부터 시작하면 좋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임신을 하고 육아를 할 마음이 먹어지지가 않았다.


우리의 의견차가 어느정도였냐면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만으로도 싸움이 날 정도였다. 꼭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할까를 고민할 때 우연히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책을 만났다. 딩크족이 되기로 마음먹은 기혼 여성들의 이야기를 인터뷰집으로 엮은 책이다. 임신을 하고자 마음을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없었으니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이 책을 사던 날 먼저 퇴근을 했던 내가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잠시 내려놓고 바깥에 다녀왔는데, 그새 집에 왔던 현이가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선 단단히 토라졌다. 현이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한참을 이야기해야 했다. 내가 지금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라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뿐이라고. 그럼에도 현이는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운한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현재의 삶이 좋았다. 이걸 내려놓기가 어려웠다. 간혹 마음에 드는 풍경을 발견하면 현이와 함께, 엄마와 함께, 혹은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예쁜 카페에 눌러앉아 손글씨로 또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는 시간이 좋았고, 서점과 소품샵을 또 감탄스러운 자연과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행복했다. 그런 인풋들은 모여서 다시 나에게 일에서 아웃풋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어주었고 성취로 돌아왔다. 작지만 아늑한 우리 집을 가꾸는 일이 좋았고 현이와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평일의 저녁과 주말의 시간은 삶의 즐거움이었다. 모임에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것 또한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주축이 되어 동료들과 협업하며 서비스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나의 일, 업무에 집중하는 그 시간도 소중했다. 나의 커리어는 발전을 거듭했고 누구나 인정하는 전문가로 거듭나고 싶다는 열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하면 포기해야 하는 자유로움이라 생각했다.


현이와 나의 엇나간 의견은 끊임없이 토론을 반복하다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인 내가 그 시기를 결정하자'라고 합의하고 마무리되었다. 나의 마음이 먹어지면 그때 임신을 계획하기로 한 것인데, 그 후에도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나에게 그 '마음이 먹어지면'이라는 시기는 좀처럼 찾아오지가 않았다. 2년이면, 혹은 3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신혼 시기는 5년이 되어도 계속 재미있었으니까. (아마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계속 재미있지 않았을까!) 




그러던 내가 임신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직장에서 만난 선배들 2명의 영향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은 결혼을 하고 3년 남짓 지났던 시기에 만난 S님이다. S님은 4살 된 아이를 키우면서도 책도 많이 읽고, 커리어 관련 공부도 착실히 하셨던 분이었다. '어떻게 육아를 하면서 그런 시간을 낼 수 있나요'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퇴근 후 스케줄표를 보여주었다. 아이를 재우고 난 8시 이후부터 하고 싶은 취미와 공부가 30분 단위로 일자별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어느 날은 30분 피아노를 치고, 그 후에는 개발언어 공부를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사진 찍기 수업을 듣고, 공동저자로 쓰고 있는 책의 원고 작업을 하며, 영어 원서 읽기 모임에 참여했다. 아이가 없어 시간이 자유로운 나보다도 오히려 더 하고 싶은 것들과 자기 계발을 차곡히 해나가고 있었다. 그날 자신의 스케줄표를 보여주던 S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숙제처럼 떠안은 사람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갈 수 있어서 행복에 충만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한창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한다> 책과 미라클 모닝이 유행하던 시절 그녀는 저녁시간뿐 아니라 새벽의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시도했고 나에게도 책을 추천해 주었다. 그렇게 육아를 하면서도 자신도 매일 착실하게 발전하는 삶을 살던 S님은 얼마 뒤 업계에서 가장 좋은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녀는 나도 언젠가 마음이 먹어지는 날이 되면 아이를 낳고 키워보는 경험을 해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직을 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꿈 노트>를 선물해 주고는 나도 훗날 내 꿈들을 이뤄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 채 멋진 모습으로 떠났다.


S님처럼 언젠가 나도 육아를 하면서도 나의 삶도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언젠가는 나도 아이를 갖고 싶다'라는 생각의 변화를 주었다. 다만 그 언젠가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어갔고 내가 정말 아이가 갖고 싶어지는 '언젠가'가 되었을 때는 어쩌면 마음처럼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임. 출. 육의 세계에 진입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그리고 그때 만나게 된 게 E님이었다.


E님은 내가 이직한 새로운 회사에서 직속 사수로 만났다. 새로운 곳에서 오퍼를 받고 이직을 해도 좋겠다고 결심한 계기 중 하나가 E님이었을 정도로 꼭 함께 일해보고 싶은 선배였다. 그녀는 브런치에서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작가이기도 했는데 글에서 일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이 묻어났다. 나를 추천해 주었던 동료가 지금까지 만난 기획자 중에 문서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일도 잘하는 사람. 실제로 입사해서 업무를 배우고 함께 일을 하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배웠고 나도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선배였다. 그런 그녀가 내가 입사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임신을 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좋은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던, 커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동료가 먼저 임신을 결심하고 임신 후에도 업무를 해나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큰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나는 현이에게 임신을 준비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S님이 준 용기 덕분에 언젠가 미래에는 아이가 있는 그림을 이미 꿈꾸고 있었고, E님을 보면서 내가 1년 3개월 동안 일에서 멀어져 있는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그 후에 육아와 업무를 병행한다고 해서, 나의 커리어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며 어렵지만 잘해나갈 수 있음을 마음먹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임신을 2번 경험해 본 옆집 언니가 '자연스러운' 임신을 원한다면 6개월도 부족할 수 있다고 했었기에 마음먹은 김에 바로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내가 고민을 하는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기 천사가 우리에게 오려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6개월도 어려울 수 있다던 자연임신은 제대로 시도한 지 한 달 만에 바로 성사되었고 나와 현이의 삶에 첫 아이가 찾아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임신 후기인 28주를 지나고 있다.


28주 차의 사진 기록


불과 2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아직 출산을 경험하지도, 육아를 경험하지도, 또 그렇게 어렵다는 일과 육아의 병행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그저 행복하다. 아이가 찾아오고 줄곧 들뜨고 행복한 마음이다(임신의 기간은 고되고 어렵고 또 중간에 잠시 우울. 불안증을 견뎌야 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이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아빠를 잃은 가족의 슬픔도 떨쳐내고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온전히 부모의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 선택마다 느낄 수 있는 삶의 행복은 다른 방향에서 각자 완전할 테니까. 나는 아이를 낳고 길러보는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나름의 삶의 행복을 꾸려가 보아야지. 


- 5월의 마지막 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계곡 옆 카페테라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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