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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온우 Oct 17. 2023

저마다 슬픔이 반짝하고 빛날 때

이별을 마주하는 마음

상가를 나설 때마다 늘 마주하게 되는 진실도 마음에 다시 새겨봅니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죽음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가슴 한켠에 저마다 깊은 슬픔을 묻고 사는 존재라는 것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김혼비. 황선우 중


마음 한켠에 슬픔을 두고 살아가는, 또는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이 밀려오는 고통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부디 그 슬픔이 분명 반짝 빛을 내기까지, 살아보아요 우리.




문득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지금 바쁘니'라고 운을 뗀 메세지에 답변을 하자 이내 전화가 걸려왔고 친구의 시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입원 중이신데 어떻게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도움을 요청하는 이야기였다. 


뇌 쪽으로는 ○○○병원, △△△병원이 유명하니까 뇌경색 쪽 잘하는 의사를 찾아봐. N사이트 카페에 가면 뇌질환 환자들 보호자들이 모여있는 카페가 있을 테니까 그쪽에 의사나 치료 방향에 대한 정보가 있을 거야. 외래가 빨리 잡힐 수 있으면 온라인으로 예약을 먼저 걸고, 큰 병원으로 전원을 하려면 지금 있는 병원에서 소견서랑 전원 신청서를 넣어주는 게 가장 빨라. 그게 안되면 원하는 병원 쪽에 전화를 걸어서...


나도 모르는 새에 숨도 쉬지 않고 조언들이 쏟아내고 있었다. 지하철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는 친구의 전화를 끊고 이야기해 주었던 내용을 다시 메세지로 보내주었다. 연신 고맙다는 친구와 이야기를 마치고 지하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다가 내려야 하는 역에서 간신히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내린 나는 지하철 플랫폼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집까지 걸어가는 20분 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단풍이 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빠가 우리를 떠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전화 통화로 '괜찮다'라고 하는 시아버지와 통화를 했다는 친구의 남편도 부러웠고(통화를 했다는 건 아직 건강하시다는 증거니까), 아빠가 보고 싶었고, 나도 저런 수많은 병원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아니고 싶었다. 아니.. 아니... 그보다 더 묵직한 것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몇 번이고 아빠가 그립다고 외쳐도 이걸 단지 '슬픔'이나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엔 어렵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빠가 쓰러졌던 그날부터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는 시간 동안, 또 제주도를 전전하며 서울 병원으로 올라오기 위해 온갖 병원에 전화를 걸며 전원을 알아보고, 어떤 병인지도 몰라 수소문하고 헤매고 아빠를 간병하기까지의 시간들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픔'이었다는 걸.


엄마, 나, 그리고 동생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깊은 슬픔과 아픔을 가슴 한켠에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런 것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빠가 쓰러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왜 나와 내 가족과 우리 아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던 시기였다. 행복했던 내 삶을 앗아간 세상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다가도 속도를 10으로 올려놓고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을 때까지 쉬지도 않고 뛰면서 세상을 소리 내어 욕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의 가장 큰 아픔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건 보상심리와도 같은 거였다. 내가 이렇게 많은 걸 잃었는데 이 정도는 얻을 수 있잖아 하는 마음이었다. 


그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실질적으로 글을 썼던 공간은 뇌질환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카페였다. 답답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질문 글을 쓴 것을 시작으로, 뇌질환을 공부하려고 책을 읽고 알게 된 점과 느낀 점을 공유하기도 했고, 섬망으로 밤이면 벌떡 벌떡 일어나서 보호자를 한숨도 자지 못하게 했던 아빠가 발병 2개월 만에 통잠을 잤던 날 다른 보호자에게도 희망이 되고 싶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땐 나의 글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댓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을 남겨주는 연대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글을 썼었다.


시간이 지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실오라기 같은 문장 하나만 내게 남아서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은지는 모르면서도 쓰고 싶은 마음에 오래 헤매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병원 정보를 알려주다가 좀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알게 되어 버린 거다. 글로 꺼내놓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내 마음이 있었다는 걸. 나의 지나왔던 시간들을 '아픔'이라고 글로 이야기로 소리 내어 불러주어야만 그제야 그게 아픔이었구나 하고 내가 나를 토닥여줄 수 있으니까. 난 글로서 그렇게 나 자신을 토닥여주고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던 거라고.




가장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때 위로를 건네주고 가장 깊이 잠겨있는 시간에 나를 수면 위로 올려준 건 문장, 글, 책이었다. 그중에 가장 지나칠 수 없던 문장은 양희은 작가님의 <그러라 그래>의 한 구절이었다.


인생이 내게 베푼 모든 실패와 어려움, 내가 한 실수와 결례, 철없었던 시행착오도 다 고맙습니다. 그 덕에 마음자리가 조금 넓어졌으니까요.

<그러라 그래> 양희은


인생이 내게 '베푼' 어려움이었다니. 그게 다 고맙다니.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난 이렇게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데.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이 시기가 나에게도 마음자리가 넓어지는 경험이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인해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조금은 희망을 가지는 마음과 경외로운 마음으로 이 문장을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언젠간 나에게도 이 슬픔이 반짝이는 날이 올까.. 과연 그런 마음이 먹어질까 하는 암담한 마음으로 그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던 시기가 있었다. 


양희은 작가님의 삶을 보면 더욱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중학생의 나이에 아빠가 돌아가셨고, 19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재산이 모두 날아가 강제로 가장이 되어 동생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으며, 20대에는 큰 교통사고로 한 번 30대에는 암 진단을 받고 또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던 시기를 견뎌야 했던 사람이 그 모든 어려움이 고마웠다고 하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싶었으니까.




비록 오늘처럼 난 여전히 엉엉 울기도 하며 도무지 괜찮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슬픔과 아픔이 내 마음자리를 넓혀주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양희은 선배님의 말이 마음으로 이해가 되었고 가슴에서 와닿았다(어느새 나도 선배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멋있으면 다 언니고 선배라고 했으니까. feat. 황선우 작가님).


그럼에도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감히 주어진다면 아빠가 건강했던 시기의 철없던 딸로 돌아가 마냥 세상이 즐거웠던 그 시기로 돌아가고 싶다. 아빠의 따뜻한 우산 아래에 숨고 싶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아직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없고, 나에겐 어바웃 타임의 팀처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아빠가 쓰러지기 전 전조증상이 있었던 그때로 돌아가 아빠를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실과 슬픔의 시기를 잘 견디어 내는 것과 이렇게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를 치유하는 일. 그리고 그러한 시기가 어찌 되었던 나의 마음자리를 수없이 넓혀주었고 나를 단단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나를 치유하기 위해 쓴 이 글이 나에게 그랬듯 힘든 시기를 견뎌내었고 견뎌야만 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없을 테니 이 글을 계속 써나가는 것일 테다.


아, 그리고 오늘처럼 때로는 부모님이 아프다는 걸 처음 겪는 가까운 이에게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조금은 힘이 되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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