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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Aug 14. 2023

어느 청년 용접공의 젊은 날의 기록

<쇳밥일지> 천현우 저

4년 전 여의도 직장인이 되었다.(뭐 정확히는 여의도 본사로 발령이 났다) 평일 여의도에 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여의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은 사시사철 같은 양복을 입은 직장인 부대가 쏟아지는 9호선, '힙'의 성지로 떠오른 더현대서울 팝업스토어의 24시간 웨이팅, 언제나 푸른 한강공원의 LED와 돗자리 그리고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건물을 돌아가며 놓인(오늘은 이 건물, 내일은 저 건물) 양대 노총의 빨간 깃발과 텐트다. 


여름, 겨울이야 사무실 창문을 꽁꽁 닫고 있어서 점심시간에야 그들을 볼 수 있다지만 봄가을 창문을 열어놓자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자고 하는 시위겠지만 소음에 도저히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황에 짜증이 밀려오고, 너무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사무실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개인적으로 2002년 효순이 미순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동당 → 진보신당을 거쳐 아주 최근까지 녹색당에 매월 당비를 납부하던 대구에서부터 꽤 특이한 정치적 지향을 가졌던 사람이지만 이렇듯 도저히 업무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면 어느 순간 쉴드가 불가능해진다. 그렇다고 밥그릇이 달린 싸움을 이어나가는 이들과(사실 지금은 저들이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도 있다. 이건 분명하다)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할 지경이다. 이런 것도 이런 거지만 지금 들리는 저 노래 '바위처럼'. 저거 20년 전 선배들이 '아직도 바위처럼 틀고 춤추냐'했던 그 노래가 아직도 흘러나온다. 


천현우 작가의 글을 이전에 SNS에서 접한 적이 있다. 당시 꽤 핫했던 글이었고 누군가는 그 글을 통해 새로운 전태일의 탄생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원 히트 원더로 끝날 것 같았던 그의 글은 그 이후로도 심심찮게 이어졌다. 물론 그 이후에는 SNS가 아닌 매체에서 접할 수 있었고, 용접공 출신의 글쟁이라는 이력이 꽤 특이했는데 그의 곧 그의 책이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책 <쇳밥일지>를 나는 이제야 접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표지를 보고 좀 뜨악했던 건 사실이다. 여의도에서 보던 빨간 깃발의 궁서체.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나 뉴스에 나오는 그 글씨체에 용접공의 모습이라니. 어쩌면 제일 적확한 비주얼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지나치고 싶은 모습이었다. 잠깐 소개했듯 나는 학부시절부터 진보 정치와 꽤 가까웠고 노동과 복지, 빈곤은 내 일생의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뭉쳤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이제는 답이 뭔지도 모르겠는 비주얼을 다시 책으로 마주하다니. 걱정 반 기대반으로 책을 펼쳤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책은 소년 전태일의 재림이나 지금도 하청에 재하청에 시달리는 노동 현장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천현우라는 청년이 지독한 가난을 뚫고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성장담이며,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던 시절 미래를 생각할 수 없던 탓에 사랑과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음의 애가이며, 그저 전태일 시절의 이야기일 줄 알았던 2000년의 노동 현장이 아직도 이러하다는 걸 알려주는 사회고발이기도 하다.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책 속의 누군가도 이야기했듯이 작가가 이 모든 이야기를 빨간 궁서체로 쓴 바위처럼 살겠다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기가 막히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SNS 세상과 노동 세계의 중간에 서서, 읽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에서 호소력 있고 흡입력 있게 써내려 간다. 읽히는 글이니 글에 힘이 있고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쇳밥일지. 쇳밥 먹으며 써 내려간 매일의 일기라는 그 제목도 읽고 난 이후에 명확해지고 적확해진다.


작가 천현우의 이력은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이제 글로 자신의 삶을 새로 시작한 작가의 어깨에는 그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노동, 청년 등의 짐이 지워져 있다. 바라건대 그 짐이 무겁겠지만 잘 견디어 줬으면 좋겠다. 그가 시대를 대변하는 좋은 글쟁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니 지레 겁먹지 마시고 읽어보시길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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