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 저
‘마흔부터는 쾌락의 양을 늘려나가기보다는 고통을 줄여 나가는 방법이 더 현명해 보인다.(전자책 p.25)’는 쇼펜하우어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잉??!!’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20년 전 철학 전공 학부시절. 분명 한국말인데도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를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를 공부하며 ‘쇼형 진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했던 내가 쇼펜하우어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니!
-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이것이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 쾌락을 찾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
- 사랑은 성욕, 종족보존의 욕구에서 기인한다.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찬 20대 청년에게 이런 쇼펜하우어의 힘 빠지는 이야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삶에는 희망이 있고 이는 행복을 찾는 인간의 노력에 기안한다. 결국 우리 인생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실존의 명제 제대로 이끌려 있던 나는 모든 게 어두컴컴했던 쇼펜하우어가 싫었다. 염세주의의 대표주자. 평생을 헤겔의 그늘 아래 있던 2인자(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인생 말년에 히트하면서 헤겔에 대한 질투도 함께 사라진..), 자살을 찬미한 철학자.(그렇지만 본인은 천수를 살았음. 사실 많은 철학자가 삶과 이론이 괴리된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가끔은 이것이 인간의 약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위대한 이론을 제시한 철학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지언정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쇼펜하우어였는데 나이 마흔에 드디어 그의 이야기가 동의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책의 제목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다.
공자는 마흔을 불혹의 나이라 했다.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나이라는 것이다. 물론 공자가 살던 세상과 2024년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4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같을진대 나의 40년은 어떤 밀도를 가지고 살았을까.
어릴 적에는 마흔이면 좀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안정되고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후배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쓰기도 하며, 정서적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언제나 여유 있는 그런 나이.
그런데 실제 마흔이 되니 내가 생각하던 마흔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아직도 내 친구들 중에는 일자리 때문에 고민하며, 아이들 어린이집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다. 부동산, 주식 등도 어지럽게 얽혀있으며 매일을 그렇게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내 나이. 조금 심한 경우 공황장애나 폐소공포에 정신과를 드나들어야 할 나이. 마흔이다.
그 마흔에게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 타인의 평가에 자신의 건강이나 목숨을 바치는 일은 어리석으며 그것은 탐욕과 집착이라고.
- 만약 우리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불필요한 불안은 사라질 거라고.
- 부는 인간의 본래 소유물이 아니라 운에 의해 줄어들어가 늘어날 수 있는 거라고.
- 고전을 두 번은 읽되, 돈을 벌기 위해 쓴 악서를 피하라고.
갑자기 이 책이 왜 베스트가 되었나 했더니 <나혼산>에서 하석진이 읽던 책이란다. 문제적 남자로 알려진 배우가 ‘인생은 혼자다. 혼자서도 단단해 질 줄 알아야 한다’라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읽어 내려간 그도 마흔이란다. 그 한 장면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든 미디어가 새삼 대단하다 싶다가도 그 한 장면이 쏘아 올린 베스트셀러라니.. 우리 도서 시장이 얼마나 취약한지 조금 답답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