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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Feb 17. 2024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 공지영 저

최근 몇 년간 글 말고 다른 일로 세간에 오르내렸지만 역시나 공지영은 글쟁이다. 글쟁이는 결국 글로 말해야 하고 글로 증명해야 한다. 책은 지리산에서 시작해 요르단을 거쳐 예루살렘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오는 순례의 이야기지만, 책을 읽는 내도록 이 이야기는 글로 시작한 공지영의 삶이 다시 글로 돌아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이들이 마냥 구원에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고, 어떤 이는 예수의 친구라는 이유로 손가락질 당해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그를 따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어야 했다. 예수를 찾던 이들은, 심지어 예수마저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이렇게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1.

원래 저런다, 혹은 원래 그랬다, 참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는 이 한 문장으로 얼마나 많은 불의와 학대와 아픔을 지나쳐 생명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혹은 죽지도 못할 만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인지.

전자책 p.52


나는 결정론을 믿는다. 두 가지 의미인데 어쨌거나 기독교인인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결정론을 믿는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기에 어떻게 살아도 같은 결과를 나타낼 것이라는 운명론과는 다르다. 우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까지 모두가 사실은 태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이며 우리는 그가 이끄시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경험치에 따른 결정론을 대부분 믿는 편이다. 물론 이는 전자와 달리 100%는 아니다. 아주 가끔 어떤 계기로 인해 내가 예전에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진 누군가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사람은 변하지 않더라. 그리고 나는 오늘도 '쟤는 원래 저랬어'라는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를 쉬 재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는 꽤 자주 반복된다.


2.

내 기도의 궁극에는 나의 불편함이나 포기, 희생 같은 것이 깃든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안녕, 나의 편리와 나의 영예로움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삶의 목적, 그것도 값진 삶의 의미를 가르쳐달라고 기도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기도하다가 정말 응답이라도 받을까 봐 겁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

전자책 p.276


올해가 들어서며 꾸준히는 못하더라도 출근길 새벽 교회당에 들러 짧은 기도를 올린다. 오래 기도해 본 사람들은 안다. 처음 나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다가도 이내 기도 제목이 고갈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때 좀 멍해지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길을 잃은 기도문은 다시 길을 찾는다. 하늘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길 원한다는 기도. 그것이 내 의지로 될 리는 없으니 내 삶의 모양 가운데 개입하셔서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처음 원하셨던 그대로 나를 빚어가달라는 기도. 삶의 의미를 알게 해달라는 거대한 이야기 말고 오늘 내 하루가 당신과 마주하기 부끄럽지 않았으면 하는 기도.


3.

"왜 자매님 아들은 죽으면 안 되는 거죠?"

다음 날 그분은 수녀원을 나왔다. 괘씸해서가 아니었다. 모욕적이어서도 아니었다. 깨닫고 치유되어서였다. 그 모진 한마디가 그분이 스스로 둘러친 유폐의 벽을 깨부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말했다.

“그 지극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교만할 수 있는지!”

p.362


자녀의 죽음만큼 우리 인생에 고통스러운 경험이 있을까. 기르던 반려동물이 우리 곁을 떠날 때의 고통도 마주하기 힘든데 자녀라니 오죽할까.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수녀원을 찾았고, 모든 수녀들이 그의 고통 앞에 숨죽여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 물었다.

“왜 자매님 아들은 죽으면 안 되는 거죠?”

그랬다. 모든 사람은 똑같다. 나이가 많던 적던, 그의 배움이나 지위가 높거나 낮건, 우리는 정해진 때가 되면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정해진 때는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 그러니 날 좀 내버려둬. 조금 잔인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그 지극한 고통 속에서 교만은 싹튼다. 고통을 빌미로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 되려 한다. 그런데 그분은 묻는다. 왜 그러면 안 되지?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문득 다시 나의 기도와 마주하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언젠가 나 또한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될 때에 도망치지 않고  그 십자가를 마주볼 수 있기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무리 앞에 선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던 사람들 앞에, 사마리아 여인과 말을 섞었다며 수군거리던 사람들 앞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던 사람들 앞에. 그 갈릴리의 사람들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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