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그래 | 정지인 저
김포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5호선, 심드렁하게 앉아 뭘 보지 하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런 웹툰 에세이는 요즘 너무너무 많다. 빵 터지는 에피소드도 없는 것 같고, 그저 그런 둥글이들의 일상 이야기가 지루할 즈음 ‘나는 잘 치이는 사람’이라는 그이 이야기에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내가 그랬다.
터널 같은 시기였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조용하고 충실한 사랑을 배웠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찾아오던 불안을 날마다 성실하게 마주했다. 아무리 고단해도 찾아온 불안을 억지로 눌러 부정하거나 윽박질러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불청객을 반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음먹고 해낸다면 못할 일도 아니 었다.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었다.
(p.86)
그런 시절이 있었다. 스스로 느끼기에 잘 살았든 그렇지 않았든 저녁에 현관을 닫고 집에 들어가자면 겨우내 지탱하던 내 몸의 힘은 다 빠져버린다. 소파나 침대에 벌렁 드러눕자면 고양이가 곁에 다가와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준다. 작은 생명이 넣어주는 바람에 다시 이곳저곳의 공기들을 채워낸다.
저자가 나와 같은 사람임을 감지한 후 자세를 고쳐 잡고 처음부터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 읽으면 될걸 왜캐 까칠한 걸까 후회하며 다시 첫 장을 다시 폈다.
편집의 힘이겠지만 ‘삐뚤빼뚤해도 행복한 걸’, ‘눈물의 바다에 배를 띄워’, ‘사랑은 실패하지 않아’ 세 가지의 큰 물결의 에피소드는 어쩜 이렇게 제목을 잘 지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맞아 떨어졌고 읽으며 저자를 알아갈수록 이 묘한 동질감은 더해졌다.
조용하고 충실한 사람, 늘 불안해하고 그래서 늘 동요하지만 그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조용히 마주하는 사람. 오늘의 샌드위치를 먹고 또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마음이 더해지면 결국 나만의 색이 나와 주변을 가득 채울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좋다. 읽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따뜻해진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책인데 이런 마음이 더해지면 그 날 하루는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해진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앞이나 뒤로 고꾸라질 구멍밖에 없는 상황에 있지만 나는 그냥 지금, 여기에 앉아 느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오늘 그려야 하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오늘 먹어야 하는 샌드위치를 먹을 것이고, 읽기로 정한 분량의 책을 읽을 것이다. 나무와 달리 나는 다음 계절의 온도와 모습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틀림없이 내가 나의 계절에 맞는 색을 뿜을 것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오늘 안에서 오늘만큼만, 비틀대지만 넘어지지 않고 살면 제때에 가장 아름다운 색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p.234)
조금 일찍 도착한 공항 라운지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조금 비싸지만 괜찮다. 제주행 비행기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이들로 가득하고, 그 가운데 뻘쭘하게 서류 가방을 든 출장 복장의 불청객 같아 보이지만 뭐 괜찮다. 나의 오늘은 꽤 괜찮을 것이기에.
참, 이 책은 웹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