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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짱고책방

타자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생각의 음조 | 한병철

by 짱고아빠

어제 본 넷플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모두가 고개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는 나레이션이 나왔다. 그렇다 요즘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살아간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 나의 시선을 맡기는 대신 대화는 줄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누군가의 눈을 마주치는 일도 낯설다. 아주 오래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낯간지럽지 않게 부르며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톡에서나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생각의 음조>는 한병철의 세 번의 강연을 모은 책이다. 짧지만 오래 남는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뜻은 멀리 간다. 어떤 책은 읽고 있는 중에도 자꾸 멈추고 생각하게 하는데 이 책이 그렇다. 고요해지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요즘은 고요하기가 쉽지 않다. 고요해지기도 전에 벌써 누군가의 알림이 도착해 있으니까.


우리는 자꾸만 자신을 만들어낸다. 더 잘나야 하고, 더 최적화돼야 하고, 어제의 나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 되묻는다. 내가 나를 추월한다는 말이 가능한 걸까. 나보다 앞서 간 나를 내가 따라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답도 없는 생각 속에 빠져있다면 지금 내가 발 디딘 곳이 조금 더 낯설어진다.


책은 말한다. 스마트폰은 당신을 '그것'으로 만든다고. 우리는 타자를 잃어가고, 대신 예측 가능한 관계만 남겨두고 있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은 서로를 전제로 한다. 가까움이 멀어짐을 필요로 하듯 고요는 결국 타자에서 온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타자를 버리고 살아간다.


그런 문장들이 마음에 들어앉았다. 어쩌면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타자'를 잃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면 속 누구도 '타자'가 될 수 없다. 늘 대화창은 열려 있지만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결되었지만 단절된 세계, 이 책은 그 틈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비관주의자 같아 보이나 희망 주의자다. 이것은 막연히 잘 될 거라는 주술적 긍정 사고와는 다르다.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희망이 없는 것 같지만 희망은 있다고. 그러니 일단 그냥 하자고 요청한다. 계산하지 말고 그냥 한번 해보자고. 지금 든 전화기로 당신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라고. 안될 거라고 미리 예단하지 말고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들을 찾아가자고. 반드시 이 희망은 용기를 필요로 하니 그 용기 지금 한번 내보자고.


책장을 덮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눈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잊고 있던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기를. 그 음조를 조용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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