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짱고영화

공존은 일치가 아니라 선택이다

주토피아2

by 짱고아빠

다시 만난 <주토피아2>


귀엽고 빠르며 디즈니 특유의 발랄함은 그대로지만 전반적인 이야기의 결은 전편보다 확실히 무거워졌다.

그냥 가볍게 보고 싶었는데 영화는 꽤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누구나 쉽게 공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시대에, 실제 그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되묻는 방식이다.


<주토피아>의 근원이 된 유토피아는 완벽한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물론 이러한 세상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고 가끔 영화 같은데서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야기는 이 주(유)토피아의 아주 작은 '당연함'이 삐걱거리는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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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으로 거슬러 간 이야기


전편이 다양성과 편견을 다뤘다면, 속편은 더 역사적인 시선을 취한다.

주디와 닉이 공식 파트너가 된 이후 이들은 우연히 주토피아의 숨겨진 기원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세계관이 낯설지 않다.

파충류 가문 '더 스네이크'가 주토피아를 설계했으나 포유류 고양이 '링슬리' 가문은 그 공로와 권력을 빼앗았고 심지어 '스네이크'들을 추방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 성취를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며 그것도 모자라 원주인을 내쫓는 것.

사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우리가 밟고 있는 땅에서도 일어났던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라 모른 척하는 것일 뿐.


니블스는 공중파 뉴스 리포터가 아닌 팟캐스터로 등장한다.

주류 미디어가 아니라 주변부의 목소리가 진실의 단서를 쥐고 있다는 암시다.



혐오의 밑바닥에는 선망이 있다


영화는 뱀들에 대한 도시의 뿌리깊은 차별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차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백 년 동안 사회 전반에 내면화되된 제도와 관습의 사회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한 발 더 들어가는데 이런 뿌리깊은 혐오의 기저에는 역설적으로 선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는다.

실제로 주토피아를 만든 것은 뱀들이었고 링슬리는 그 것을 빼앗았다.

영화가 진행될 수록 알게 된다. 뱀들은 모든 면에서 고양이들보다 우월한 집단이었으며 끝까지 존중받을만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이후에도 고양이들은 집요하게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

(예전에 흑인은 백인데 비해 모든 면에서 우월했고 그래서 백인은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실제로 스포츠, 음악 등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이들은 왠만하면 흑인이다.)


빼앗았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고, 숨길수록 두려움은 커지며, 두려움은 혐오로 전환된다.

이 혐오에 기인한 차별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조작이며, 역사에 대한 선택적 망각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전편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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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은 일치가 아니라 당신이 중요함을 선택하는 것


주디와 닉의 관계는 이번 영화의 또 다른 중심이다.

전편이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면 속편은 그 신뢰가 얼마나 쉽게 삐걱대는지를 보여준다.

주디의 과잉된 정의감에는 책임감과 불안이 섞여 있고 닉은 여전히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둘은 서로의 내적 동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고 이는 곧 갈등이 된다.


둘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목한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 내뱉는 닉의 대사는 꽤 결정적이다.


'우리가 달라도 상관없어. 내가 상관하는 건 결국 너야.'


공존의 전제는 의견의 일치가 아니다.

그럴지라도 관계에 대한 책임을 선언하고 지키려 하는 이가 공존을 말할 수 있다.


주디가 흔들릴 때 그를 붙잡고 나아가게 하는 것도 거대한 명분이 아니라 주디의 결정이다.


'이 일이 게리에겐 중요하다.'


그는 친구를 선택했고 그길위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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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혼자서 책임질 수 없다


영화는 마지막에 분명히 말한다.


'세상은 절대 당신 혼자서 책임질 수 없다.'


이 문장은 우리게 전하는 위로이자 경고다.

선한 의지 하나로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며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는 믿음이다.

구조적 차별의 뿌리에 섞인 혐오와 선망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가 진실이라고 말하는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상대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영화만큼 낙관적이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함께 계속 물어야 한다.

당근녹음기가 깨진 뒤 새로운 말이 다시 녹음되는 것처럼.

그 말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더욱 간지러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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