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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나 Oct 23. 2020

가사노동의 자리를 지키는 그대에게 바치는 헌사

사랑과 헌신 vs. 부불 노동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 즈음이니

꽤 오래전 기억이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를 만난 딸아이가

낯가림도 없이 처음 본 그 친구와 잘도 어울렸다.

엄마 입장에서는

그 친구의 보호자와 웃으며

아이들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는 것은

기본 예의였다.

그런 호의를 가득 안고 이야기를 건네려던 찰나,

상대방 분께서 먼저 하시는 말씀

"딸이 의사라 내가 손주를 대신 봐주고 있는데

새댁은 일 안 하나 봐?"

순간,

몇  가지 대답할 내용들이 넘버링되어가며 떠올랐지만

모두 생략하고  한 대답은

 "네 ", 한마디였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아직도 컬컬한 무엇이 목에 걸린 듯 남아 있다.


15년도 더 된 기억이

아직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난 분명 그 당시

만 3세 이전의 아이 육아를 전담하며

가사노동의 끝없는 미로 속에 갇혀

내 인생 가장 힘든 노동의 현장에  있었는데

일을 하지 않냐고 묻는

의사 딸을 가진 한 어머니께

노동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나 자신의 의기소침함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유급 노동자 의사인 딸의 노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급 가사노동자였던 동네 새댁이라는 포지션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알아서 포복하는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아직도  아프다.


'혁명의 영점'을 쓴 실비아 페데리치는

임금지급이 되지 않는 부불 노동인 가사노동의 문제들을 지적하며 재구성했다.

우선, 가사노동은 성별 분업화되어 있다는 것과

둘째,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만들어 무급노동으로 받아들이게 했지만

셋째, 실제는 무급 가사노동을 바탕으로

기업은 지급하지 않은 부분의 이윤을

얻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쉽게 이해를 돕자면,

남편이 출근할 때 입는 셔츠 다림질을 하기 위해

새벽 1시가 다 되어 퉁퉁부은 다리로 서서

졸음을 쫓아가며 한

다소 화상의 위험성을 내포한

한밤중의 다림질이라는 내 노동에 대해서

남편의 회사는 내게는 전혀 급여를 지급하지 않고

당연한 듯 자기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다.

실제가 이러할진대

되려 자본과 국가는

피곤한 아내를 이렇게 세뇌시킨다.

'피곤한 남편을 먼저 자게 하고

그 늦은 밤 연신 하품을 해대며

셔츠 주름을 피는

놀라운 사랑과 헌신!

이것이 아내의 위대한 사랑이며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이여라!'라고.


페데리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2년 <국제 여성주의 공동체>(International Feminist Collective)를 설립하여

가사노동 임금지급 문제를 쟁점화했다.

페데리치의 이러한 노력은

가사노동은 여성노동이라는

기존의 성별분업화된 인식에 균열을 냈고

자본주의적 이윤을 위해 가사노동의 부불노동화가 필요했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시도들이

아직도 여전히 쟁점화된 그 자리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간다.


나는 가끔

내게도 나 같은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누군가의 아내인 내가

아내를 상상한다는 것 또한

가사노동의 성별 분업화에 기초한 거라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하는 일을 누군가 해 주면

멈춰 선 학위논문도 빠르게 진척될 것이고

text를 읽거나 씀으로써 얻는

위로와 기쁨도 누릴 텐데 말이다.

욕실 곰팡이를 없애느라

온 영혼을 끌어모아

철수세미로 락스 뿌린 자리를  박박 문지를 일도 없어

늘 파스를 달고 사는 손목도

휴식을 취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가사노동의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다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는

일하던 바쁜 엄마 덕에

초등학생 때부터 지켜왔기에

짬밥만 어언 40년이다.

그러나 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나는

매번 처음같은 서걱거림을 느낀다.

가끔은 치밀어 오른 화를 다루느라

아주 소극적으로

그러나 나름 거칠게

고무장갑을 벗어 패대기를 치

"I See!"의 탄식을 내뱉거나

손빨래하던 흰 세탁물을

노의 감정 가득 실은 맨발로  

사정없이 휘저어 밟아버린다.

그 속도 모르고

남편과 딸은

 "좀 생산적인 일을 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해"라는 말로

살살 약을 올리고,

엄마 역시,

"어째 너는 일을 해도 한 표가 나지를 않네"라며

별로 좋지도 않은 불같은 내 성격

(아이고!)

기름을 붓곤 하신다.


이제 요점 정리를 좀 해 보자.

첫째, 가사노동은 너무나 적극적인 재생산 노동이다.

둘째, 가사노동을  보이지 않는 무급노동화, 자연화시킨 것은 자본의 논리에 기인한다.

셋째, 가사노동의 성별 분업화와 부불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제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원치 않지만 그 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는

모든 가사노동자들에게

당연히 돌아갔어야 할 존중과 위로를

지금 바로 건네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들의 찬란한 유급노동을 위해

가족 안의 가사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기를.

한편으로,

너무나 생산적인 가사노동의 자리를

지키는 그대가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든

기쁨과 만족 안에 있든

상관이 없다.

그대들 모두에게

존중과 감사를 올리는 한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그리고 늘 그 자리가

그대에게 익숙치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만큼 애쓰고 집중해야할 노동의 자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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