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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도가와 J May 17. 2020

히로시마현 - 오코노미야키

전쟁은 인류의 삶과 식생활을 극도로 변화시킨다. 살아남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새로운 음식이 탄생되고, 전후에는 하나의 문화로 뿌리 내리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히로시마현의 소울푸드인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는 6.25때 우리나라 국민들이 보릿가루에 쑥이나 콩을 더해 만든 개떡의 역사와 비슷한 것 같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의 탄생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히로시마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리틀보이(Little Boy)라고 불리는 원자폭탄을 떨어트렸다. 이로 인해 당시 히로시마시의 인구 35만명(추정) 중, 10만명 이상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 서민들은 식자재가 부족하여 배급제를 실시했다. 서민들은 정해진 금액을 지불하고 감자를 주식으로 채소와 야생초 그리고 쌀을 조금 섞은 죽 같은 걸로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패전 후 미국으로부터 지원물자로 소량의 밀가루가 보급되었고, 이를 물에 풀어서 반죽해 파나 콩나물을 얹어서 철판(당시 히로시마는 철을 다루는 공장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철판을 손에 넣기 쉬운 환경)에 구워먹었다고한다. 이를 일전양식(一銭洋食)이라고 부르며, 히로시마사람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길거리 음식이였다고 한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의 역사관련 기사에서 인용


1955년부터 주택의 일부를 개조하여, 오코노미야키를 제공하는 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히로시마의 관음(観音)지역 파가 비싸서, 저렴하면서 양이 많은 양배추를 사용하게 되었고, 거기에 돼지고기와 면을 더하면서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의 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가게는 전쟁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생계를 위해 시작한 가게가 많아서, 000ちゃん(여성들에게 부치는 호칭, 한국의 000양 같은 의미)상호명이 많다고 한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는 글자에서 유추할수 있듯이, 좋아하는 것을 넣고, 풍성하게 해서 배불리 먹자는 취지에서 면을 넣어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오사카나 도쿄는 일반적으로 밀가루 반죽에 속재료(돼지고기, 해산물과 채소 등)를 같이 섞어서 굽는 반면에, 히로시마는 밀가루 얇게 구운다음 그 위에 채소와 고기를 얹고, 다시 그 위에 면을 올려 층을 쌓아서 굽는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관련기사에서 사진인용


1975년 일본 프로야구 팀인 Hiroshima Toyo Carp가 센트럴 리그 첫 우승을 거머지고, TV에서 히로시마 시내의 오코노미야키 가게가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현재 히로시마현에 2,000개이상의 점포가 있고, 그 중 히로시마시에 절반인 1,000점포가 영업중이라고 한다. 진정 오코노미야키는 히로시마의 소울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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