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시나브로”, 그 뜻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다. 1981년 결성된 시나브로밴드, 1998년 탄생된 시나브로담배(난 담배를 피지 않지만), 국어시험의 단골어휘, 나에겐 추억을 되살려주는 단어다. 10년간 취재로 일본전역을 다니며, 대략 5,000여명의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 중 시나브로라는 우리말에 딱 어울리는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2019년 Y본부의 치매(癡呆)취재로 도쿄의 위성도시인 하치오지시(八王子市)를 방문했다. 이곳은 장모님의 고향이라 아내랑 자주 갔던 친근한 동네인데, DAYS BLG(Barrier Life Gathering)라는 멋진 단체가 있는줄 몰랐다.
일본에서 치매의 치(癡)는 어리석을 치로 남은 생애에 지적능력이 부족하고, 매(呆)는 멍청이로 멍하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치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권을 무시하고 모멸적이여서, 일본사회에서 치매환자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가 확산되지 않기 위해 인지증(認知症)이라는 단어를 고쳐서 사용한다고 한다. 앞으로 나 또한 치매가 아닌 인지증으로 표현하고 싶다.
이 단체는 일본에서 흔히 볼수 있는 데이서비스(Day Service, 시설에 거주하지 않고, 하루 개호서비스를 받을수 있는 곳)업체지만, 인지증을 가진 사람들을 케어하는 것이 남다르다.
일반적으로 인지증이 있으면, 일 같은건 할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여 시설에 모여서 얘기하고, 노래부르고, 종이접기 같은 간단한 것을 하는게 전부인데, 이곳의 회원들은 매일 유,무상 자원봉사를 한다. 큰돈은 아니지만, 돌봄직원들과 함께 전단지를 돌리거나, 세차를 하거나,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이벤트를 열거나 그들을 돌봐준다고 한다.
그 원동력은 뭘까? 대표를 맡고 있는 모리야상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인지증이 있지만, 단순 간호받는 것을 싫어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평범하게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돌본다. 그게 어찌 쉬운일인가? 지역주민들을 설득해야하고, 영업해서 일도 따와야하고,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도 처음에는 인지증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할수 없다. 길을 잃어버린다. 말하는 것도 제대로 할수 없다”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했는데, 지금은 지역 내의 자연스로운 동료가 되어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였다. 세차장에서 만난 세차의뢰자는 인지증 환자가 할수 있는 일과 능력을 살릴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누구든 일할 곳이 없으면 자신감을 잃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지면서 고립된다고 했다. 이렇게되면 인지증 증상이 심해지기 때문에 저희가 해야할일은 그들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할수 있는 것을 찾아, 그것을 열심히 할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현재 일본 전역에 이런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작은 행동이 언젠가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2015년 장수마을로 알려진 나가노현에 U본부의 <시니어들의 인생 2막> 취재로 다녀왔다. 우리가 방문 한 곳은 오가와무라(小川村). 인구 2,300여명, 이 중 45%가 65세이상이고 가파른 계단식 밭이라 경작도 쉽지 않고, 교통도 불편한 곳이지만, 지역진흥성공사례로 매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그 비밀은 향토요리인“오야키(おやき)”와 정규직에 정년퇴직이 없는 “오가와쇼(小川の庄)”회사다. 오야키는 옛부터 화로에 둘러싸여 만들어 먹은 이 지역의 소박한 음식이다. 채소와 산나물을 기름에 볶다가 된장이나 간장으로 간을 하고 밀가루 반죽에 싸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만든다.
오가와쇼의 사훈은 밝고 즐겁고 활기차게다. 1975년 콘다상은 이 동네의 청년 7명과 함께 마을의 고령화와 과소화를 걱정했다. 1986년 힘을 모아 양잠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을 개보수하여 출자금을 행정에 요구하지 않는 제 3섹터의 방식으로 오야키 제조판매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은 슨조로웠고, 1989년 로스엔젤레스에 열린 재팬 엑스포89에 참가하여 오야키 12,000개를 판매하여 국내외 미디어로부터 주목 받으며 탄력받기 시작했다. 설립 당시 시니어들을 정규직으로 고용, 입사 60세에서 정년이 78세였지만, 1996년부터 정년제도를 철폐하였다. 2015년 취재팀이 방문했을때, 최고령 직원은 90세였다. 그들은 오가와무라가 가지고 있는 자원, “농산물”과 “시니어들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역발상으로 서로 협력하고 단결하여 80명의 직원을 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7명의 청년들의 도전정신과 이 고장 어머니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국도 고령화, 저출산으로 인해 지방도시가 사라질 위기에 쳐해있고, 헬조선이라고 불릴만큼 젊은층에 희망이 없는 나라로 비쳐지고 있다. 하지만 오가와무라는 열악안 환경 속에서 비젼과 독창성이 있는 리더를 중심으로 각자가 할수 있는 작은 행동이 모여 강자가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