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에서 탈구조주의까지
'집', '가족', '성공' 같은 단어들은 단단해 보이지만, 시대가 바뀌면 그 의미는 끝없이 미끄러진다. 산업화 이전의 '가족'과 오늘의 '가족'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이 미끄러짐은 우리가 오래도록 믿어온 '절대적 중심'의 균열이며, 인간이 스스로 세운 질서의 틈에서 시작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언어가 흔들릴 때, 세계도 흔들린다.
인류의 사유는 언제나 중심(Center)을 세워왔다. 그 기원은 플라톤(Plato)에게 닿는다. 그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불완전한 그림자로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완전한 진리의 세계를 이데아(Idea)라 불렀다. 그리고 그 모든 이데아의 근원에는 '일자(The One)', 즉 완전무결한 실체가 있다고 말했다.
이 사유는 중세에는 신(神)으로, 근대에는 이성(理性)으로 형태를 바꿔 이어졌다.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유럽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들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서양 철학은 플라톤이 세운 '중심'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 왔다는 뜻이다.
중심이 생기는 순간, 주변이 만들어진다. 중세의 신 중심주의는 마녀사냥과 이교도 학살을 정당화했고, 근대의 이성 중심주의는 식민지배를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푸코가 분석한 근대의 정신병원과 감옥은 '정상'이라는 중심을 지키기 위해 '비정상'을 격리한 공간이었다.
오늘날에도 '정상 가족',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중심은 한부모 가정과 장애인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겉으로는 질서처럼 보이지만, 중심은 늘 위계와 폭력의 구조를 낳았다. 인간은 자신이 세운 중심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며, 그곳을 '진리'라 불러왔다.
20세기 중반,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등장했다.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는 단어의 의미가 고정된 본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Difference)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아들', '딸'이라는 관계망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는 이 원리를 문화와 신화에 적용했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마저 언어와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구조가 짜놓은 문법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구조주의는 "너는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더 큰 구조의 일부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곧 스스로의 한계에 맞닥뜨렸다. 구조는 공시적(synchronic) 관점, 즉 특정 시점의 체계만을 포착할 뿐, 언어와 문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구조주의는 그 '흐름'을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구조' 자체가 또 하나의 고정된 중심이 되어버렸다.
이 한계를 무너뜨린 것이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였다. 자크 데리다(Derrida)는 언어의 내부에서 의미의 균열을 찾았다. 그는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미루어지고(defer), 차이 속에서만(differ) 생성된다고 말하며 '차연(différance)'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근대 유럽, 현대 한국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며, 그 의미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의미의 중심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밝혔다.
한편 미셸 푸코(Foucault)는 언어 밖의 권력 관계에서 진리의 조건을 물었다. 데리다가 텍스트 내부의 불안정성에 주목했다면, 푸코는 진리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Power)의 산물임을 드러냈다.
지식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광기'와 '정상'을 가르는 기준, '범죄자'를 정의하는 방식은 모두 특정 시대의 권력이 만든 담론이었다.
중심이 사라진 세계는 불안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 새로운 관계의 사유가 태어났다. 의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차이와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흩어진다.
오늘날의 사회도 여전히 새로운 중심을 세운다. '정상 가족', '진짜 국민', '정답'이라는 단어들이 그 증거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정의를 향해 질주하고, 그 밖의 것들을 배제한다.
그러나 세계는 본래 중심 없이 흐른다. 의미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관계의 장(場) 속에서 태어난다. 중심을 잃는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조건이다.
플라톤의 일자(一者)에서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으로 — 신의 세계에서 관계의 세계로 — 인류는 절대적 중심을 잃어가며, 동시에 사유의 세계를 확장해왔다.
중심이 흔들릴 때, 세계는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