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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enses of Time

<이니셰린의 밴시>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을 사는 우리

아름다운 풍경 속 가장 잔인한 이야기

by Jwook

추석 명절이 시작됐다. 이번 명절은 유독 길기 때문에 그동안 묵혀놓거나 추천받을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그래서 연휴 기간 동안 추천할 영화 몇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추천할 작품은 디즈니플러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영화 한 편, 콜린 패럴 주연의 '이니셰린의 밴시'다.


이 영화의 감독 마틴 맥도나는 흔히 ‘작가주의 감독’이라 불린다. 그는 상업적 성공보다 자신만의 세계관과 언어를 구축하는 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온 감독이다.


2006년 단편영화 '식스 슈터'로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킬러들의 도시', '세븐 싸이코패스'를 거쳐 '쓰리 빌보드'로 골든 글로브 4개 부문을 수상하며 거장 반열에 올랐다.


연극 무대에서 다져진 대사 감각, 인간의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주제, 그리고 냉소와 유머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이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종종 그를 타란티노나 코엔 형제와 비교하지만, 맥도나의 세계는 조금 다르다. 그의 카메라는 폭력의 순간보다 그 폭력을 견디는 인간의 얼굴을 더 오래 응시한다.


⚠️ 이 글에는 영화 내용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다면 감상 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그와의 만남은 아일랜드 서쪽 해안의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풍경으로 시작됐다. 초록빛 들판과 잔잔한 바다, 그리고 작은 돌담들이 이어진 그 평화로운 풍경은 영화가 담고 있는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이야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보는 내내 강렬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그 선택이 이렇게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길 줄은 몰랐다.

영화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 해안 풍경 속 촬영 현장

친구에서 타인으로, 극단적 결별의 시작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평생 절친이던 파우릭콜름이 어느 날 갑자기 절교를 선언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이유 같지만, 이 관계의 단절은 점차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다정함이 체화된 파우릭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그냥 예전처럼 지내면 안 돼?" 그의 질문은 진심이다. 반면 콜름은 냉정하리만치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리고 파우릭이 계속 말을 걸 때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낸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다. 손가락을 자르는 행위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관계의 끊어짐을 각인시키는 가장 잔인한 은유다. 물리적 고통을 통해 "나는 너와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느끼는 상실감보다 자신의 욕망이 더 중요하다는, 가장 극단적인 거부의 몸짓이다.

잔잔한 술집 풍경 속, “더는 친구가 아니고 싶다”는 콜름의 단호한 선언

같은 공간에 갇힌 두 사람

이 영화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공간'이다. 영화의 배경인 1923년의 이니셰린 섬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좁은 공간이다.


현대 도시라면 연락을 끊고 각자의 삶을 살 수 있겠지만, 이 섬에서는 절교를 해도 매일 마주쳐야 한다. 펍에 가도, 길을 걸어도, 창밖을 내다봐도 상대방이 보인다. 도망칠 수 없는 물리적 공간은 인간관계의 갈등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압력솥과 같다.

콜름의 단호함과 파우릭의 상실감이 교차하는 순간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시간'이었다

더 중요한 건, 이 두 남자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우릭에게 시간은 영원히 반복될 일상이다.


매일 아침 당나귀 제니에게 먹이를 주고,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친구와 수다를 떤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 그에게 삶은 계속 이어질 평화로운 일상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반면 콜름에게 시간은 유한하다. "나는 지루해. 네 얘기는 다 들었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음악이나 만들고 싶어."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다. 모차르트를 언급하며 '남을 무언가'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은 종말 앞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그에게 파우릭과의 일상적 대화는 소중한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이것이 둘을 파괴한 진짜 이유다. 한 사람은 영원을 믿고, 한 사람은 종말을 의식한다. 같은 펍, 같은 술집 의자에 앉아 있지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산다. 한 사람의 시계는 느리게, 다른 사람의 시계는 빠르게 흐른다.


공간이 시간을 가두다

더 비극적인 건, 좁은 섬이라는 공간이 이 시간의 차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도시였다면 콜름은 그냥 이사를 가면 됐을 것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펍을 찾으면 됐다. 파우릭 역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좁은 섬에서는 선택지가 없다.


공간의 고립이 시간의 긴장을 증폭시킨다. 콜름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는데 벗어날 수도 없는' 답답함이, 파우릭에게는 '영원히 이어질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쌓여간다. 손가락을 자르는 극단적 행위는 바로 이 '공간적 탈출 불가능성''시간적 절박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폭발한 것이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은 결국 섬을 떠난다. 떠날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반면 정신적 장애가 있는 도미닉은 섬에 갇혀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심지어 파우릭의 당나귀 제니까지 죽는다. 이 섬에서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존재들은 모두 파멸한다.

섬을 떠나는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 떠날 수 있는 자가 살아남는다.

가장 슬픈 건, 둘 다 틀리지 않았다는 것

파우릭의 일상도 소중하다. 당나귀를 돌보고, 친구와 수다 떨고,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삶. 그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다. 콜름의 예술도 소중하다.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욕망. 시간이 흘러도 기억될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열망. 그것 역시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은 결국 둘 모두를 파멸시켰다. 빠른 시계와 느린 시계는 함께 갈 수 없었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존중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시간의 리듬만을 고집했을 때, 관계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영화가 1923년 아일랜드의 이야기일까?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우리도 사실 각자의 '작은 섬'에 갇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회사라는 섬. 매일 같은 사람들과 마주하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관계들. 상사는 "빨리빨리"를 외치고, 당신은 "좀 천천히 가면 안 될까요?"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당신의 시계와 그들의 시계는 다른 속도로 흐르지만, 좁은 사무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매일 충돌한다.


가족이라는 섬. 부모는 "넌 아직 시간이 많아"라고 말하지만, 당신은 조급하다. 결혼, 출산, 커리어... 모든 게 마감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당신은 부모에게 "천천히 하세요"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짧다.


SNS라는 섬. 알고리즘이 만든 타임라인 안에서 우리는 같은 사람들, 비슷한 생각들과 끊임없이 부딪힌다. 누군가는 "힐링이 필요해"라며 느린 삶을 노래하고, 누군가는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며 빠른 삶을 강요한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외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소모된다.


채워지지 않는 공간

나 역시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존재의 의미, 삶의 본질, 예술의 가치. 그런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다. "오늘 뭐 먹었어?" "날씨 좋네" "주말에 뭐 해?" 그들의 대화는 일상의 표면을 맴돈다. 처음엔 답답했다. 콜름처럼, 이런 일상적 대화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왜 모두 겉만 훑는 걸까. 왜 아무도 철학과 인문학, 예술에 관심이 없을까.


그래서 나는 다른 곳에서 그 갈증을 채운다. 가끔 오프라인에서 우연히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 밤새 토론할 수 있는 그런 순간들. 그 시간들은 정말 소중하다.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고, 새로운 관점이 열리고, 함께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느낌. 이런 대화 후엔 늘 충만함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공허함이 찾아올 때가 있다. 헤어지고 혼자 걷는데, 문득 오래된 친한 지인 형님이 떠올랐다. 만나면 항상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만 한다. 아이 양육하는 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별것 아닌 일들, 요즘 먹어본 맛집 이야기. 소주 한두 잔 기울이며 나누는 그런 대화. 파우릭과 나누던 그런 시간들.

아일랜드의 거친 바닷가 절벽 위, 두 남자가 마주 앉아 맥주를 사이에 두고 침묵을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 순간이, 그날따라 유독 그리웠다. 깊은 대화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런 공간이 우리 안에 있는 게 아닐까. 의미를 찾는 대화가 우리를 성장시킨다면,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는 우리를 쉬게 한다. 전자가 정신의 양식이라면, 후자는 마음의 안식처다.


콜름은 파우릭 없이 살 수 있었을까. 깊은 사유만으로 그의 삶이 완전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파우릭이 주던 그 편안함,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 그저 함께 있어도 되는 그 순간들이 없었다면.

우리에겐 둘 다 필요하다. 의미를 찾는 대화도,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되는 대화도. 깊이 파고드는 시간도,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진다.


이 영화가 내게 던진 질문

파우릭의 "우리 그냥 예전처럼 지내면 안 돼?"는 사실 "내가 외롭지 않게 네 시간을 내게 줘"라는 요구였을지 모른다. 콜름의 "난 중요한 일이 있어"는 사실 "너와의 시간은 의미 없어"라는 선언이었을지 모른다. 둘 다 상대방의 시간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얼마나 유의미하게 지내느냐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아 있는 시간'의 길이가 짧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더욱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콜름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바로 그 절박함이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상대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걸 잊어버린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가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리고, 상대가 보내는 시간은 '무의미'로 평가된다. 영화는 그 끝을 보여준다.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은, 이해와 존중 없이는 결국 모두를 파멸시킨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비극은 1923년 아일랜드의 작은 섬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좁은 공간들—가족, 회사, 친구 관계—에서도 매일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걸을 수 있다

당신이 일상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나는 그 시간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볼 수 있다. 내가 깊은 사유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그 고독이 내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시간을 나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너를 존중한다. 네 시간을, 네가 사는 방식을."

이 한 문장을 서로에게 건넬 수 있다면, 우리는 손가락을 자르지 않아도 된다. 섬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파멸시키지 않아도 된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100년 전 아일랜드의 이야기를 빌려,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관계의 비극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도 남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살지만, 그 차이를 존중할 수 있다면,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아름다운 풍경 속 가장 잔인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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