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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구름 기린 Jun 20. 2019

1.글로리아, 회색의 청사진

독립의 첫 시작

만 24년 몇 개월. 핏줄인 누나와 같이 살아온 기간이 그렇게 길었다는 건 계산해 보고서야 '아..' 하는 얘기


대학교 2학년이었던 빨간 립스틱을 가끔 칠하고 엑센트를 몰던 누나는 이제 우리가 태어났던 고향을 떠나 엄마 집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매형은 이제 누나와 같이 사십 중반, 군대 갔을 때 태어난 내가 안으면 소리만 빽빽 지르던 우리 조카는 키만 홀쭉한 중학생이 되셨다.


선택권은 없었다. 부모 양쪽이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는 막내가 그나마 데리고 살아주는 건 누나밖에 없었다.

엄마가 했던 살뜰함을 막둥이 데리고 이십 대 초반에 돈 벌고 살아야 했던 누나에게 기대하긴 힘들었다. 욕을 먹고 혼이 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버티고 커야 했지만 그래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주는 데, 그냥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대단한 사람, 나는 많이 비뚤지 않고 큰 선방한 케이스였다.


부모의 이혼 + 양친 어느 쪽도 책임져주지 못하는 환경 + 아버지가 누나에게 내 교육보험을 털어 누나 등록금을 대었다는 같잖은 족쇄가 시작이었지만, 36살 2월까지도 같이 살았으니 그런 조건들 다 감안하고서도 때가 지나도록 오래 얹혀살았다. 살다 보니 매형이 생겼고, 군대 상병 휴가를 나오니 갓난쟁이 조카가 나왔고, 유치원 초등학교 올해는 중학생이 됐다. 매형은 살갑지는 않았지만 진득하고 참아주는 성격이라 부담을 준 적은 없었고 조카는 똑같은 성격의 나와 누나사이에서 적당한 메신저가 되어주었지만, 본의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골은 깊어졌다. 서로 일주일간 나누는 말은 몇 마디가 채 안 됐다.


생활비를 대면서도 받는 쪽도 주는 쪽도 불만인 쌓이는,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쉬는 날이면 근처 커피숍 소파 자리가 내 방 보다도 편해진 지 오래.


생각하면 2~3년 전쯤에는 나왔어야 했는데, 모든 불편함과 심리상태를 아는 절친의 한 마디가 

이번에는 머리에 오래 박혔다.

'서른여섯인데, 올해는 차를 사던가 집을 나오던가 둘 중 하나 하자.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


독립을 미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직장생활 5년이 넘었음에도 여유롭지 않았던 통장잔고,

그리고 나에 대한 불확실함. 잘해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불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깡통전세에 패악에 가까울 정도의 집주인과 세입자의 얘기들.

그런 것들이 항상 독립과 현재의 유지를 저울에 올렸을 때 나를 안주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저울이 급작스레 한쪽으로 기울었다.


결혼이 불확실한 지금 언젠가는 결국 내 삶을 살기 위해 나와야 하고, 환경에 맞는 전셋집을 찾는 어려움,

세입자의 설움, 집안일과 내 삶을 관리해야 하는 일 모두 결국 지금 하지 않으면 미루게 될 뿐이라고.

어차피 비루하게 시작될 처음이면 마흔에 돈 몇 천을 더 쥐고 마주하는 것보다 서른여섯 지금 마주하고 

적응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나을 거라고. 


일주일 만에 엄마와 누나에게 통보를 시작했다.

나가겠노라고.


낙관론보다 비관적인 조망에 가까웠던 독립 시작의 1월의 추운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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