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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Sep 11. 2020

편집자가 하는 일이란

제가 편집한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옵니다.


기념으로, 편집자가 책을 만들면서 하는 일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 봤어요. 이 책 편집에 관한 얘기는 아니고 편집 일반에 관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랑 다른 생각으로 일하시는 편집자들이 많고, 그들이 주류일 거예요. 저는 아마도 비주류 편집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일하는 게 조금씩 다릅니다. 일하는 스타일도 있습다. 무엇인가를 개선하기보다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례에 따라 소극적으로 일을 하는 스타일이 있고, 관례와 관습보다는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혁신을 시도하는 스타일도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 같은 것이지요. 편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후자 스타일로 편집 일을 합니다.


편집자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을 소개합니다.


교정/교열

잘못된 철자를 바로잡거나 문법에 어긋난 표현을 고치는 정도의 작업입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하는 일도 합니다. 책에 담긴 문장은 문법에 맞는 바른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정/교열이 편집의 기본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실은 지적당하기 싫어서 하는 편집작업이 교정/교열입니다. 그것 말고는 출판에 기여하는 바가 적습니다. 그래서 이건 좀 낮은 단계의 편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교정/교열이 훌륭하게 되었다고 그 책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교정/교열이 더러 문제가 있다 해서 그 책의 훌륭함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책 내용은 엉망인데 교정교열만큼은 잘된 책이 흔하다 보니, 한국 편집자들은 대체로 교정교열에 집중하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언어 수준 탐색

책은 언어집입니다. 언어에는 생각이 담기지요. 표현된 언어가 더 중요한 책이 있고, 표현되어야 하는 생각이 더 중요한 책이 있습니다. 문학은 전자이며, 나머지는 다 후자입니다. 후자인 경우 편집자는 저자 원고를 읽으면서 저자의 언어 수준을 탐색합니다. 사람마다 수준이 다릅니다. 모든 저자가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에요. 심지어 세계적인 석학도 문장이 구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편집자가 좀 손을 봐야지요. 책에 담긴 내용에 비해 언어 수준이 좋지 못해서 잘 어울리지 못한다면 저자의 언어 수준에 속박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언어 수준에서 시작하되, 편집자는 자꾸 더 나은 표현을 떠올려 봅니다. 편집자가 생각해야 하는 표현은 단어일 수도 있고, 어구일 수도 있고,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문학을 편집하는 경우, 표현된 언어를 따르되, 그 표현에 의지하는 생각이 매력적인지, 인과성이 있는지, 설득력이 있는지를 고민하여 저자와 소통합니다.


스타일 찾아주기

저자가 문장을 썼지만 일관된 스타일이 없거나, 이어지는 문장을 통해 전해지는 의미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면 아마도 의미에 어울리는 문장 스타일을 저자가 못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편집자는 그런 스타일을 찾아주는 일을 합니다. 만연체 스타일을 짧은 단문 스타일로 호흡을 바꿀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며, ‘이다’체를 ‘입니다’ 스타일로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해체와 재결합

저자는 스스로 목차를 정해서 원고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원고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편집자는 저자가 어째서 그런 순서와 질서로 글을 썼는지를 존중하되, 독자의 수용 관점으로 의심해 봅니다. 저자의 진심과 메시지가 독자에게 더 분명하고 매력적으로 전달되는 질서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저자가 정한 순서와 질서를 해체하고 재배치해 봅니다. 레고를 해체하고 다시 결합하고 쌓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논리 때문이든, 독자의 관심사 때문이든, 필요하다면 저자에게 추가 원고를 요청합니다.


원고 일부 버리기

저자가 책을 쓸 때에는 욕망과 환상이 정점에 이를 때입니다. 나쁜 건 아니에요. 사실 그런 게 없으면 책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꾸기도 하지요. 자기 관심사를 모두 책에 욱여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문장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들이 다른 내용과의 조화를 해치고 책의 메시지를 흐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편집자가 그걸 통제하지 못하면 독자가 저자를 비난합니다. 편집자는 저자를 지켜줘야 하거든요. 그러므로 때때로 설익은 원고를 과감히 삭제합니다. 물론 편집자가 자기 취향과 개인적인 의견을 이유로 저자의 원고를 삭제하면 안 됩니다.


제목 선정

책에서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이지요. 나쁜 제목이 책 전체의 명예를 훼손할 수도 있습니다. 편집자는 기획부터 편집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제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단히 제목 후보를 메모하면서, 어떤 제목을 선택해야 책의 메시지를 잘 담으면서도 독자에게 소구력 있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부제까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꿈속에서도 생각합니다. 고민을 계속 하다 보면 결국 좋은 제목이 떠오릅니다. 신기하게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자의 생각도 중요하지요. 편집자가 생각해 낸 제목을 저자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그 제목을 버립니다. 다시 생각합니다. 편집자가 확신하고 저자가 마음에 들어할 때까지.


판형과 본문 디자인 정의

편집은 편집자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책 내용은 누구보다 편집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형식이 무엇인지를 디자이너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면 책임있는 자세라고 말하기 어렵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디자이너가 본문에 디자인을 입힌 다음에 편집자가 검토하지요. 그러나 한번 정해진 형식을 완전히 바꾸기 어렵고, 디자이너가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자기 기예를 발휘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거꾸로 편집자가 원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가장 알맞은 판형을 선정하고, 서체와 레이아웃을 정의해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한 다음, 그 후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집자는 디자인을 디자이너 만큼이나 고민해야 합니다.


예가 필요하겠지요.


다음은 제가 디자이너에게 보낸 일종의 본문디자인 작업가이드안입니다. 판형은 120*188mm로군요. 작은 사이즈입니다. 그리고 서체와 본문 레이아웃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서체는 SM세명조 계열이고, 9.7pt입니다. 여백에 대한 가이드도 수치로 정확히 정했습니다. 물론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조금 수정되었어요. (좀 흐릿해도 이해해주세요)


어떻게 작업이 되었을까요? 대략 이렇습니다. 책등 쪽은 제본영역이어서 (아래 그림에서는 오른쪽입니다) 거기에 여백을 좀 더 주었습니다.




이런 모든 작업은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편집자는 저자를 신뢰해야 합니다.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히 독자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부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편집만 잘 한다면(내가 일만 잘하면) 이 책은 틀림없이 좋은 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편집자가 저자를 믿되, 표현된 겉모습이 아니라 그/그녀가 어떤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를 고민하면서 편집하면 좋은 책이 나옵니다. 그리고 저자는 저술을 통해 자극을 받고 더 성장할 것이며, 독자는 독서의 즐거움과 유용한 지식을 얻겠지요.  


책이 출간된 다음 모든 영예는 저자의 것입니다.

편집자는 ‘아, 내가 그런 책을 작업했었지.’로 끝납니다.

그런 것이 그저 편집자의 일이고 몫이겠지요.



최근 코디정이 편집한 책


http://aladin.kr/p/8fLR7

http://aladin.kr/p/6f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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