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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Oct 28. 2021

가장 철학적인

57. 인류사에 기념비적인 제네바협약을 소개합니다


어렸을 때 본 전쟁영화들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 있었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이었다. 누군가 엄폐물에서 고개를 들기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뛰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적군의 총알을 맞는다. 그러면 이미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외침이 이어진다. “위생병!”

아무리 시끄러워도 의무병은 자기를 부르는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무수한 총탄과 절규가 지옥 문을 열어버린 그곳. 그러나 의무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병에게 달려온다. 가끔 포탄에 흙이 튀기기는 해도 의무병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기로 의무병이 달려오면서 총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의무병은 총을 맞지 않는다. 어린 나는 이게 신기했다. 그러다가 잊어버렸다.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정작 26개월 동안 병역을 치를 때조차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렸을 적 의문을 기억해 내지 못했으므로 알 방도가 없었다. 의무병이 총을 맞지 않는 까닭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1864년 인류가 제네바에서 한 일을 알게 되고 나서였다.

그해 8월 22일 유럽 12개 나라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들이 제네바에 모여 조약을 체결했다. 그걸 제네바협약(Geneva Convention)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196개국이 가입되어 있다(UN 가입국보다 더 많다). 이 조약에 적힌 법의 정신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 같은 신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상자와 환자를 후송하는 교전 당사자들과 후송 요원들은 전적으로 중립으로 간주돼야 한다.”, “부상자나 환자인 전투 요원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고 수용해서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중립의 혜택을 누리는 요원은 완장을 착용할 수 있을 것이로되, 백색바탕 위 적십자가 표시돼야 한다.”

그러니까 의무병은 국제조약에 따라 ‘중립으로 간주’된 것이었다. 중립이니까, 적십자 완장을 찬 의무병을 조준 사격하지 말자는 인류의 약속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약속을 어기고 조준 사격하는 군인들도 있었을 것이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무작정 난사하는 병사도 있었을 터이며, 멀리서 날아오는 포탄에는 인정도 사정도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약속이라도 있으니까 의무병이 전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구하러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겠는가.



그러다가 나는 현대 전쟁이 아닌 옛날 사극을 생각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가 봤던 사극에 나오는 전투 장면을 떠올려 보는 것인데, 잔혹한 이미지밖에 연상되지 않았다. 의무병이 있었던가? 적군이면 적군인 게지 무슨 부상병 타령인가. 부대가 패전한 마당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자가 어떻게 죽음을 피하겠는가. 포로도 잡히면 참수되거나 노예가 되는 상황에서 누가 부상당한 패잔병을 치료해 주겠는가. 신의 가호가 없다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없다면, 부상병은 죽는다. 포로도 죽는다. 잔인하지만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전쟁이었다. 그걸 1864년 조약이 바꾼 것이다.

인간이 가장 흥분해 있고 가장 포악해져 있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적과 우리가 같은 인류라는 사실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깨닫는 정도가 아니지. 아예 법으로 만들어서 집행한다. 지금껏 나는 이렇게 착한 인류를 들은 적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체계적이며 가장 규범적으로 실천하는 인류가 바로 전쟁터에서 총을 든 사람들이다. 지난 세기 인류가 증명한 것을 주시하라. 이 체계적인 규범을 가장 잘 지킨 나라가 강대국이며 결국 전쟁을 이긴다.



어떤 이는 이런 아이러니를 하찮게 여기면서 어째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에 힘쓰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이의 결론에 동의한다. 하지만 손가락을 1센티만 움직이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실제로 방금 전까지 그런 행동을 했던 흥분한 사람이 어떻게  평정심을 갖고 인내할 수 있을까? 과거의 인류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함을 1864년 이후의 인류가 증명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군대에서 ‘그렇게 인내하는 것’이 의무라고 지휘관이 병사들을 교육했기 때문이며, 또한 병사들이 그런 지휘관으로부터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답은 쉽다. 과거의 인류처럼 군인들은 인내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잔인한 중동의 테러리스트 집단처럼. 그런데 어째서 그런 교육이 가능했을까? 정답이 여기 있다. 제네바협약이라는 법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건 하찮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당신, 홍길동 호모 사피엔스는 필경 1864년 이전의 인류와 차이가 없다. 같은 DNA다. 그러나 당신 홍길동 호모 사피엔스는 과연, 당신의 동료를 죽인 적군이 앞에 높인 이 시험에서 당신이 과거 인류보다 더 진화된 인류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과연 손가락 1센티미터를 인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당신 곁에는 항상 인류의 의무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건 하찮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인류의 모든 철학은 결국 제네바협약으로 귀결된다.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인류애다. 철학적인, 가장 철학적인 법률, 그것이 제네바협약이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휴머니타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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