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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Nov 17. 2022

괘씸한 철학번역 1

<번역하다>에 연재를 시작하며


월간잡지 <번역하다>에 연재한 글을 공유합니다. 저렴해요. 구매해서 봐 주세요! 가격은 8,000원. 가능하다면 1년 정도 연재해 보고 싶습니다. 


언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특히 한국어는 그 사정이 심하다. 이 나라에서는 특유의 역동적인 문화와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이 쉽게 바뀐다. 의식이 바뀌면 언어도 영향을 받는다. 이런 사회 문화적인 요소에 더해, 한편으로는 한자가 지배한 조선 시대의 언어에 맞서 한글로 표현하려는 근대 정신의 분투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배라는 특수한 환경이 있었다. 영어의 경우 지금의 단어와 문법으로도 백 년 전의 텍스트를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한국어는 사정이 달라서 지금 세대가 백 년 전의 한국어 텍스트를 거의 읽지 못한다. 다른 오래된 언어와 비교할 때, 현대 한국어는 기호 면에서나 문법 면에서 사실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언어이다. 발육과 성장을 위해서는 자꾸 도전하고 모험해야 하는 언어이다. 전통적으로 지켜야 할 언어의 유산이 적기 때문에, 더 좋은 어휘와 더 나은 표현의 가능성이 풍부하다. 이 글은 그런 도전과 모험 중 사소한 하나이다.


언젠가 나는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기존 번역본이 있는 책을 다시 번역해서 출간하는 일은 그만하자는 비평이었다. 나는 그이의 견해가 바뀌기를 소망한다. 다른 사람의 성과를 존중하고 쓸데없는 경쟁을 하지 말자는 의도는 이해한다. 그러나 언어의 변화가 심한 이 나라에서는 지식을 전하는 언어의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어서(단지 오역의 문제가 아니다), 원문에 담긴 지식과 지혜가 당대의 한국인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면, 수명이 다한 언어를 고집할 게 아니라, 더 나은 번역으로 자꾸 개선해야 할 사회적 요청이 있다. 특히 철학의 경우, 백 년을 넘게 지속된 기존 세대의 번역이, 현대 한국어와 ‘사맛디 아니’하다. 오히려 식민지배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철학이 ‘일본식 훈고학’에 갇혀 있는 지경이다. 철학번역이 인류의 지혜를 한국인에게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이 나라에서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으니, 기존 번역이 있더라도 새로운 번역을 시도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일본어 철학번역과 사전의 문제


한국에서 문맹은 사라졌다. 한국어를 모르는 한국인이 없다. 모두가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쉽게 얻는다. 그런데 ‘문해력’ 문제가 생긴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된 글을 읽는데 그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씌어진 한국어의 문제인가? 철학의 경우 문해력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한국어로 씌어진’ 텍스트가 많다. 그것은 철학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철학번역자의 한국어 탓인가? 나는 이런 의문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철학번역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들이 한다. 대체로 박사 학위의 권위와 ‘원문’ 번역의 권위를 내세운다. 그들이 번역을 잘했으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가가 철학번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들은 ‘철학용어’를 적절히 번역하기 위해 사전을 참고하면서 다양한 조사를 한다. 그러나 사전이 그들의 작업에 곰팡을 일으킨다. 도대체 이 나라 철학번역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일본어로 철학번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학과 산업 분야에서 인류에 공헌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나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나라에서 위대한 철학자가 배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니시 아마네(1829~1897)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발명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시간’, ‘공간’, ‘이성’, ‘긍정’, ‘부정’, ‘명제’, ‘개념’ 등의 단어도 발명했다. 니사 아마네의 이런 발명품은 현대 한국어에 잘 편입됐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 그것도 백수십 년 전의 옛 일본인이다. 서양정신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것을 일본에 제대로 전파한 사상가도 아니다(유학자였던 그는 서양의 물질적인 성과에 주목한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수많은 철학용어를 발명해 냈다. 일본어처럼 한자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은 ‘당분간’ 그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존경하기에는 그들이 이 나라에 남긴 폐해가 심각하다. ‘선험(a priori 혹은 transcendental)’, ‘우유성(accident)’, ‘오성(understanding)’, ‘통각(apperception)’, ‘규준(canon)’, ‘변증(dialectic)’, ‘질료(matter)’ 등과 같은 단어도 일본인이 만든 단어이다. 이런 단어들이 한국 철학번역의 족쇄이다. 또한 서양 사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발생한 일본식 엉터리 번역도 있다. 그런 족쇄를 차고도 지난 백 년 동안 편안하게 여긴 결과가 오늘날의 철학번역이다. 한자를 이용해서 단어를 발명하는 좋지 않은 버릇도 일본인 특유의 번역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독자대중의 언어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오만함을 추적하다 보면 결국 전근대적인 문화를 만난다. 그러나  차별과 배제를 혐오하는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그런 오만함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학자들은 일본식 단어를 그대로 계승한다. 마치 일본인처럼 한자어를 조립하는 버릇에 여전히 중독돼 있다. 어째서 평범한 한국어에서 단어를 찾지 않는가? 


사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철학 분야만큼 학자들에게 권위가 인정되는 분야도 드물다. 사람들은 그 권위를 존중하고, 학자는 명예를 얻는다. 이런 일은 매우 자연스럽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권위가 잘못 작동하여 하나의 사건을 구성할 때가 있고, 그 경우 학자가 학문의 세계를 범한다. 학문을 무지의 감옥 안에 가두는 사건은 학자가 세상에 내놓는 언어로 말미암아 생기는데, 학자의 권위에 사전이라는 다른 권위가 더해지면서 거의 영구적인 미해결 사건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실로 무섭다 하겠다. 예를 들어 저명한 대학의 철학과 교수 홍길동이 서양 고전을 번역하면서 자기 멋을 부린다. 마치 자신이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수준으로 가장 정확하게 번역해 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자어를 조합하여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낸다. 또한 기존 단어를 사용하면서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 제멋대로 의미를 바꾸어 버린다. 나는 이를 ‘언어 유린 사건’이라고 부른다. 평범한 독자들은 읽어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독자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문해력을 잃어버렸다. 홍길동의 권위는 작동하므로 인류의 교양이 전문학술도서로 둔갑해 버린다. 그리고 홍길동과 그의 제자들이 그런 언어를 이용해서 논문을 쓴다. 이번에는 사전 편찬자가 정보를 수집하면서 홍길동이 쓴 그 언어를 국어사전이든 외국어사전이든 사전에 등록한다. 이로써 언어 유린 사건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번역가는 그 알리바이를 신뢰하고 사전에 등재된 단어를 사용한다. 소장파 학자 임꺽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홍길동의 번역이 한국인의 언어감성에 맞지 않고 쓸데없이 철학을 어렵게 만든다고 우려한다. 그는 고민 끝에 새로운 번역을 해야겠다고 의욕한다. 사건을 해결하려면 사전을 봐야 한다. 임꺽정은 사전을 펼쳐 본다. 어? 홍길동의 번역에는 이미 알리바이가 있었던 것이다. 사전은 홍길동의 번역이 올바름을 증거한다. 임꺽정은 자신의 한국어 어휘력을 한탄하면서 모험을 그만둔다. 외국어에 능통한 학자 성춘향이 등장한다. 역시 홍길동의 번역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달리 번역하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사전을 펼쳐 확인해 보니 홍길동의 번역이 맞는다는 것이다. ‘아, 내 한국어가 좀 부족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에 작업을 포기한다. 이것이 이 언어 유린의 무한순환 사건의 전모이다. 사전에는 이런 사건의 알리바이가 있음을 유의해야 함에도 번역가들에게 이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이 철학번역의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이런 일들이 한 세기를 거치면서 철학번역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로막는다. 


실증 모델링

나는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한국어 번역을 통해 실증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실증 작업 내내 내 머릿속에서 독립운동가 정신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이 나라에서 제대로 철학번역을 해내려면 우리는 일본에서 독립해야 한다, 앞서간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언어의 덫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실증작업은 ‘단어’와 ‘문장’ 두 가지 관점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글에서는 ‘단어’만을 소개한다. 캠브리지 대학 출판사의 영어번역본과 해켓 출판사의 영어번역본을 비교본으로 사용했다. 실증 대상은 백종현 번역본과 최재희 번역본이었다. 


무엇이 한국인에게 바람직한 철학 용어 번역인지 기준이나 항목을 정해야 했다. 단어는 저마다 위상을 갖는다. 나는 네 가지 항목으로 단어의 위상을 정의했다. 의미 모호성(명백하거나 의심스럽거나), 난이도(쉽거나 어렵거나), 정합도(의미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오해 가능성(의사소통에 이익이 되거나 장애가 되거나)이었다. 나는 이러한 항목의 위상을 탐구하는 것을 ‘단어 토폴로지’라 칭하면서, 각 항목을 행렬의 성분으로 갖는 2x2 행렬로 수학적 모델링을 시도했다. 즉, 단어 토폴로지에서 각각의 단어는 위상값(Wp)을 갖고, 그 위상값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위와 같은 행렬을 기호로 표시해 보자. 의미 모호성을 Wa, 난이도를 Wd, 정합도를 Wc, 오해가능성 Wm로 나타내면, Wp는 다음과 같다.



또한 행과 열을 분리하여, 



등으로 2개의 성분으로 좀 더 간단하게 모델링할 수 있고, 이렇게 하면 단어의 위상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유리하다.  


행렬의 성분 값은 낮을수록 좋다. 그 값은 0~4 범위의 정수로 정했다. <모호성Wa에 대해서 0은 그 의미가 자명함을, 1은 자명한 수준은 아니지만 명확함을, 2는 그 의미가 다소 명확함을, 3은 그 의미가 다소 모호함을, 4는 불명확함을 나타낸다. 숫자가 커질수록 좋은 번역의 단어가 아니다. <난이도 Wd에 대해서 0은 초등학생도 아는 수준, 1 은 중학생 수준, 2는 고등학생 수준, 3은 대졸자 수준이라면 의미를 아는 데 어려움이 없는 수준, 4는 전문가 수준의 난이도를 갖는 단어를 나타낸다. <정합도Wc에 대해서 0은 본래 의미와 일치함을, 1 은 번역어와 원문의 단어가 동일성 범위 안에 있음을, 2는 그 의미가 약간 불일치함을, 3은 유사한 수준의 의미임을, 4는 오역으로 한국어 의미가 원문과 많이 다름을 나타낸다. <오해가능성Wm은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한다. 0 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의미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음을, 1은 일반인 사이에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나 다른 용어를 사용하던 전문가에게는 낯선 정도를, 2는 오해 가능성이 조금 있음을, 3은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함을, 4는 소통이 불가함을 나타낸다.  어느 항목이든 3~4에 해당하는 점수가 하나라도 있으면 의미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나쁘다. 철학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단어이기 때문에 대안을 탐색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단어의 위상값은 아래의 Wi이다. 



이제 이러한 실증 모델에 기초해서 구체적인 실증작업의 결과를 하나씩 소개한다. 


perception

학자들은 ‘지각’으로 번역한다. 이것의 위상값은 다음과 같다. 정합도 점수가 4이며, 이는 거의 오역에 해당하는 번역이다.



본래 지각(知覺)이라는 단어는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런 능력을 뜻한다.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으로 이 단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칸트 철학에서 perception은 감각(눈, 코, 입 등)을 통해 바깥 사물(대상)을 우리 머리 안으로 수용해서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뜻하며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아직 제대로 된 앎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의 용어이다. 예컨대 디지털 센서가 대상을 센싱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perception이다(이때 센서는 센싱된 데이터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걸 알려면 데이터를 처리할 프로세서가 필요하고, 칸트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감각자료를 처리하는 프로세서가 ‘지성’이다). 그런데 과거 칸트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일본 학자가 그런 뜻을 갖고 있는 perception을 ‘知覺’으로 번역했던 것이고, 한국 학자들이 그걸 수용했다. 이런 번역에서는 깨달음이나 숙고를 통해 앎에 이른 상태가 연상되기 때문에, 한국인 독자는 칸트가 의도하는 수준보다 더 큰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니 아주 잘못된 번역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다른 단어는 없을까? 당연히 있다. <순수이성비판>에 400회 이상 등장하는 perception은 마치 적외선 센서가 인체를 순식간에 ‘센싱’할 때의 그 센싱의 의미와 같고, 따라서 ‘감지’라 번역되는 것이 적확하다. 물론 국어 사전에는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함’이라는 뜻풀이가 지각이라는 단어에 등재되어 있고, 영어 사전에도 perception의 한국어 뜻풀이로 ‘지각’이라는 단어가 기재되어 있지만, 그것은 학자들의 번역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기보다는 한국인이 갖는 그 단어에 대한 보통의 의미를 오래전 지식인(철학자)들이 함부로 오염시킨 사건의 ‘결과’로 이해된다. 즉, 앞에서 언급한 ‘사건의 알리바이’다. 과거 일본 학자의 칸트 번역 유산을, 이제는 정말이지 청산하자. perception을 ‘지각’으로 배운 학자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지만, 평범한 한국인이 칸트 철학에 입문하기에는 ‘감지’라는 번역어가 유리하다. 






Apperception

학자들은 일본식 번역을 계승하여 ‘통각’으로 번역한다. 정확한 번역일지는 몰라도(정합도 점수 1), 모호성, 난이도, 오해가능성 점수가 모두 4에 해당한다. 쓸데없이 철학을 어렵게 만드는 대표적인 단어이며, 독자대중을 깔보는 인식이 들어있는 번역이 바로 ‘통각’이다. 이 단어의 위상값은 다음과 같다.



 ‘통각’이라는 단어를 접하는 한국인은 백이면 백, 고통스러운 자극에 의해 발생하는 통각(痛覺)을 연상한다. 그러나 학자들의 번역어는 그런 단어가 아니라 ‘統覺’이다. 이것은 우리말이 아니다. 한자를 조립해서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 내는 일본식 단어이며, 일본 학자가 그렇게 번역한 것을, 과연 그러하다며 한국 학자들이 반성 없이 수입한 번역어이다. 특별한 해설이 없다면, 평범한 한국인은 이 단어를 해독할 수 없다. 칸트 철학에서 apperception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 수용된 각종 데이터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돼서 앎에 이르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앎은 대상이 자기 의식(self-consciousness)을 만남으로써 생긴다. 이때 인간의 자기의식이 그 대상의 감각다발을 지성 개념을 이용하여 하나로 연결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로 ‘아, 그거구나’라고 판단한다. 그것이 바로 apperception인데, 우리 한국인에게 이런 개념에 맞는 단어가 없는 것일까?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족쇄를 풀고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자각(自覺)’이다. 중학생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면 ‘자각’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한국인이 없을 것이다. 그 단어에 칸트의 문장이 더해지면 해설자 없이도 apperception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영한 사전에 등재된 ‘통각’, ‘명각’, ‘유화’ 모두 버린다. ‘이해’라는 단어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 단어는 ‘자기 의식’이라는 존재가 느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각’이라는 단어에 견줄 수 없다.







나는 이런 식으로 <순수이성비판>에 수록된 철학용어들을 실증해 봤다. 단어들을 평범한 한국어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철학의 난해함이 묶은 때가 벗겨지듯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그중에서 몇몇 중요한 단어를 연재를 통해 공유하고 싶다.


인간은 지식을 언어로 얻는다. 생각은 언어에 의존한다. 언어를 모르면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지식을 얻지 못한다. 모든 언어는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단어마다 난이도가, 문장보다 복잡도가 다르며, 그런 난이도와 복잡도에 따라 지식의 전달력이 달라진다. 지식을 쉽게 얻으려면, 가급적 알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복잡한 문장보다는 단순한 문장을 쓰는 것이 좋다. 이는 이 사회 어느 곳에서나 요구되는 일반 언어 사용법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철학번역은 지난 백 년 동안 이런 요구를 외면해 왔다. 우선 서양 철학의 수입 시점에서 적당한 한국어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로 말미암아 그 한국어를 고민할 사회적 형편이 못되었고, 또한 정작 이런 문제를 시정해야 할 당사자들이 오히려 이 문제의 심각함을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 학자들이 서양철학의 대부분을 일본식으로 번역했음을 알고 있다. 소수의 한국 학자가 일본 학자들을 사사해서 그들의 언어가 지금껏 전승돼 왔다. 백 년 전에는 ‘일본식 언어’에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 시대 문맹률이 77%에 이르러서(조선총독부 조사 자료, 1930) 어차피 이 땅에서 철학은 소수의 전유물이었으므로 ‘더 쉽게’ 학문할 이유가 적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광복 후에도 자신이 배운 일본식 언어를 제자들에게 전수했을 것이며, 학자들은 일본 서적으로 공부했을 것이다(지금도 일본 철학용어를 수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철학자들은 저항을 모르는 순한 모범생처럼 아무런 비판 없이 스승의 언어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역할만을 했다. 그러나 그사이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벗어나자. 언어활동은 생각, 사물, 세계의 윤곽을 제시하는 활동이다. 철학은 언어활동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생각, 사물, 세계의 윤곽을 제시하는 활동이다. 요컨대 생각, 사물, 세계의 윤곽을 제시하는 못한다면 철학이 아니다. 철학번역도 마찬가지다. 생각, 사물, 세계의 윤곽을 제시하는 못한다면 제대로 된 철학번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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