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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Apr 25. 2019

코디정 책을 편집하다2

칸트를 평범한 한국어로 번역해내기


20대 학창시절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칸트를 이해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라는. 그만큼 난해한 철학자라는 거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서양지식인이 쓴 다양한 책을 접했는데 그때마다 칸트가 너무 흔하게 인용된다. 솔까말, 이해능력에 관해서 서양인의 유전자가 동양인보다 특히 뛰어날 리는 없지 않은가. 칸트가 그렇게 어렵다면 서양인한테도 마찬가지일 텐데, 너무 흔하게 칸트가 인용된단 말이지.


이런 나의 의구심은 그저 간단한 변명으로 얼렁뚱땅 넘어갔던 것 같다. "주입식 교육" 때문일 거라고. 서양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생각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난해한 사유를 하게 되었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주입식, 암기식 교육 때문에 깊은 사유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더라도 공부를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런 한국식 교육이어도 난놈은 생기게 마련이고, 깊고 난해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지식인들도 등장하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어째서 한국인들은 칸트를 이해하지 못한채 그저 이해불가한 철학자로 치부하고 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어쩌다 보니, 그 까닭을 "나름" 찾게 되었다. "지식인의 난문" 때문이라는 것. 지식인이 사용하는 한국어 수준이 지식을 성공적으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실패한 한국어가 계속 전파되고 심지어 연구되고 재인용까지 되면서 칸트의 그다지 어렵지 않은 메시지가 난문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만 것이다. "번역을 잘 못했다, 오역이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말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칸트를 번역한 책에는 '난문'이 수두룩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원봉 박사가 번역한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라는 책이 있다.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내용적으로는 매우 평이하다. 그런데 '그래서'라는 접속어가 메시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또한 <개인의 좋은 기질과 행복이라는 잣대>와 <선한 의지>를 비교하면서 선한 의지를 더 설득력 있게 부각시켜야 하는 문장인데, 비교에 명암이 없는 문장이다. 첫 번째로 사용된 '분명'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이어야 하며, 두 번째로 사용된 '분명'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전해져야 하는데, 독자가 그걸 구별해내기 어렵다. 게다가 몇 줄에 한 번씩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어구/표현이 등장한다. 몽롱한 부분에 밑줄을 그어본다.


"세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성, 위트, 판단력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정신의 재능은 선하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고, 또는 단호함, 뜻한 바에 대한 끈기 같은 타고난 기질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선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도로 악하고 해로울 수도 있는데, 의지가 그 타고난 선물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지가 가진 고유한 성질을 품성이라고 부른다. 행운의 선물도 마찬가지다. 권력, 부, 존경, 심지어 건강, 그리고 아무 탈 없이 지내는 것과 자기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대담하게 한다. 그래서 만약 그것들이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바로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행위 원칙을 전부 바로잡아 보편적이고 목적에 맞게 만드는 선한 의지가 없다면 때로는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성적이고 공평한 제삼자는 순수하고 선한 점이 전혀 없는 존재가 계속 잘 사는 것을 보면서 결코 기뻐할 수 없다. 그래서 선한 의지는, 누군가가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 자체인 것 같다는 것이 분명하다."


원문의 내용을 쉽게 번역하면 이렇다. 앞의 밑줄에 대응하는 부분을 밑줄로 표시한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선한 의지만큼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불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세상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성, 위트, 판단력 그리고 정신의 다른 재능이 선하다고 일컬어질지도 모릅니다. 용기, 결의, 인내 같은 기질도 여러모로 선하며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그런 재능과 기질을 사용하는 의지가, 그러므로 성격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내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이들 선물은 극히 나빠지며 해로워집니다. 행운에 관한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의지가 없다면 사람들은 자주 콧대를 높이며 거만해집니다. 행복이라 불리는 것들, 권력, 부유함, 명예, 심지어 건강과 웰빙과 자기 처지에 대한 만족감 때문이지요. 선한 의지는 행복이 인간정신에 올바르게 영향을 미치도록 만듭니다. 또한 선한 의지는 행동의 모든 원리를 바로잡아주며 그 원리가 목적에 맞도록 조정해 줍니다. 순수하고 선한 의지라고는 전혀 없는 존재가 계속해서 번창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공정하고 이성적인 관중이라면 결코 즐겁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선한 의지는 행복다운 행복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단락의 문장 자체가 애당초 어렵지는 않다. 칸트의 메시지를 캐치하는 게 힘든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 단락의 문장은 어떤가. 알 듯 말 듯 몽롱한 문장이다. 하지만 이 단락을 이해해야, 다음 장에서 "도덕형이상학의 필요성과 역할"로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연 변증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마자 대부분의 독자는 이해를 포기하지 않을까 한다.


"순진함이 훌륭한 것이기는 해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없고 쉽사리 꾐에 빠진다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보다는 행위를 본질로 하는 지혜조차 학문을 필요로 한다. 학문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가 지시한 것을 널리 퍼뜨리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욕구와 경향성들이, 이성이 높이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의무가 내리는 모든 명령에 저항하는 것을 느끼는데, 그러한 욕구와 경향성의 충족을 모두 끌어 모아 행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성은 경향성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면서, 말하자면 너무 강렬해서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요구들(어떤 명령으로도 제거될 수 없을 것 같은 요구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이성 자신의 지시를 명령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자연의(본성의) 변증법이 생겨나는데, 그 변증법은 엄격한 의무의 법칙들을 피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그 법칙들의 타당성을, 적어도 그 순수성과 엄격함을 의심하려는 성벽이다. 또한 그 법칙들을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소망과 경향성에 더 맞추려는, 다시 말해 그 법칙들을 근본적으로 못쓰게 하고, 그것에서 모든 위엄을 빼앗아버리려는 성벽인데, 평범한 실천적 이성조차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원문의 내용을 쉽게 번역하면 이렇다. 칸트는 앞에서 '이성이 명하는 의무'에 대해서 매우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한 다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의무를 저버리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천진난만함은 실로 눈부십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게 잘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쉽게 꾐에 빠지지요. 그러므로 심지어 지혜조차 학문이 필요합니다(지혜는 지식에 있다기보다는 행위함과 행위하지 않음에 있습니다만). 학문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지혜의 가르침에 입문하고 또 오래 지속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성은 인간에게 의무를 존경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성향은 그런 의무의 명령에 저항하는데, 이는 마치 강력한 균형추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욕망과 성향에 굴복하고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간략히 변명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끈질기게 명령하지요. 성향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매우 충동적이며 동시에 그럴싸하기도 하고 또한 어떤 명령으로도 억제되지 않으려는 성향의 요구를 이성은 묵살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순성이 생겨납니다. 이런 모순성은 엄격한 의무의 법칙에 맞서 변론하고 의무의 정당성에 의혹을 제기한다거나, 의무의 순수성과 엄격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의 경향이며, 의무의 법칙을 우리의 욕망과 성향에 더 어울리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즉, 이런 모순성은 의무의 법칙을 그 근원에서 타락시키며 법의 전체 존엄을 파괴하려 듭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평범한 실천이성이 선함을 요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권투에서. 가벼운 잽을 많이 맞으면 결국 피로가 쌓여 쓰러지게 된다. 지혜를 구하고자 앞선 시대에 산 현인들의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려고 해도, 자잘한 난문이 계속 이어지면 결국은 이해를 포기하고 쓰러지고 만다. 책은 읽었으나 메시지를 구할 수 없으니, 애꿎은 현인만 비난한다. 난해하다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쓸모 없는 얘기라고.


독자가 무슨 책임이 있겠나. 칸트와 독자를 연결해서 칸트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지식인의 한국어가 좋지 않기 때문에, 메시지를 전하기는커녕, 편견과 오해와 거부감만 만드는 것이다. 칸트만이 아니며, 지금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것이 한국 근대사에서 한글의 역할이었다. 문맹은 효과적으로 치유했으나, 여전히 지식을 전하는 데에는 자꾸 실패한다. 아직 어린 언어이므로 더 많은 애정과 사랑으로 우리 한국어를 가꾸는 게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꾸 뭔가를 시도하고 실험하고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래서 실험정신으로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의 기초를 "굿윌"이라는 이름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몇 년 걸려서 이 실험의 결과물을 냈다. 2018년 9월의 일이다. 수십 번의 편집과정을 거쳤다. 여전히 이 언어실험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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