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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ul 22. 2019

살리카법

6호 |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살리카법

프랑스와 독일에서 여성 군주가 없었던 이유


지금껏 인류사는 남성의 역사였습니다.

동전은 앞면만 있는 게 아니지요. 뒤집으면 뒷면이 나오고 거기에는 ‘여성의 굴욕사’라고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여성이 음지에 있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대체로 그랬다는 이야기지요.


프랑크 족에 속하는 살리 일족은 5세기에 갈리아(Gallia 또는 Gual) 지역을 석권합니다.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일대입니다. 살리 프랑크 군주인 클로비스 1세(Clovis I 446~511)가 프랑크 왕국을 건설합니다.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이지요. 이 할아버지가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후손으로 지목된 분이지요. 



프랑크족? 게르만족? 살리족? 헷갈리지요.


유럽에는 <살리카법>이라는 고대의 게르만 부족법이 있었습니다. 유럽 왕가의 거의 공통 조상이 된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 1세(446-511)가 6세기초에 만든 법이라고 알려졌습니다. 14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유럽을 혼란에 빠트린 규정이 이 살리카법에 있답니다. “여성은 어떤 토지도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먼 친척보다 사랑하는 부인과 딸이 더 귀할 테니까 사실 말이 안 되는 규정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대도 물론이거니와 당시에도 그다지 설득력 없던 법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왕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되었겠지요.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고 800년이 지나면서 이 법전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히고 말았습니다. 고서를 먼지와 함께 모아두는 곳에서나 겨우 숨쉬고 있던 낡고 소멸된 법이었겠지요. 그사이 프랑크 왕국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왕국과 공작령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런데 1316년에 프랑스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국왕 루이 10세가 아들 없이 죽었습니다. 동생인 필리프가 섭정을 맡았지요. 하지만 국왕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물론 섭정은 권력을 형의 딸에게 주기 싫었습니다. 권력을 지지해줄 사람을 설득할 그럴싸한 논리가 필요했습니다. 고심했겠지요. 권력은 달콤하고 나눠 갖는 것도 싫은데 타인에게 물려주다니요. 섭정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왕권은 남자만 누릴 수 있다고요.


이런 일이 프랑스에서 벌어지자 유럽 전체가 난리 났습니다. 그 전까지 다른 지역에서는 여성이 상속받고 통치도 하고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유럽의 왕가와 공가는 결혼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지요. 왕권과 영지에 관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남자가 상속에서 유리하기는 했습니다. 상속권이 있는 남자들은 공주와 공녀의 남편(이들도 귀족이거나 왕족이겠지요)에게 영지와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아주 싫어했으므로, 이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짓는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법전을 찾아내어 부활시킵니다. 파리의 대도서관에 쌓여 있던 고서를 발견해냈겠지요. 살리카법입니다. 대부분의 유럽의 왕족은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후예들이었으므로, 조상이 만든 법률은 딱 알맞은 권위를 부여했지요. 하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살리카법을 근거로 논란 없이 아들에게 왕위를 세습시킬 수 있는 장점도 있었지만, 만약 왕에게 아들이 없다면 이웃나라에서 살리카법을 근거로 왕위를 요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고대의 법률이 뭐가 중요하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겠고요. 전쟁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 살리카법의 부활로 말미암아 유럽은 20세기까지 계속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백년전쟁'이 있었습니다. 더 큰 규모로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고요. 스페인에서도 백년에 걸쳐 내전이 반복되었고 결국 20세기 스페인 내전까지 이어집니다.


프랑스와 독일에는 여왕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살리카법 때문입니다. 프랑크 왕국이 프랑스와 독일 군주들의 공통조상이라는 점, 그래서 고대 프랑크 왕국의 살리카법의 권위를 내세우기 쉬웠다는 점, 그리고 남자들이 권력에서 여성을 배제하기 위해 잘도 써먹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여왕이 한 번도 없었다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독일은 19세기 제2제국과 20세기 제3제국(나치) 외에는 공작/후작들이 독립하여 통치하는 영주 국가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절대군주가 나타나서 독일지역(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북부 이탈리아를 포함)을 전부를 통치하는 경우가 드물었지요. 그 까닭도 아마도 살리카법에서 유래되었을 거예요.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이후 게르만 민족의 전통과 유산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문화가 강했는데, 살리카법에는 부모가 죽으면 그 영토를 형제들이 골고루 나눠주도록 규정하고 있었거든요. 이런 방식으로 천년 동안 계속 분할상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통치권이 계속 쪼개지는 것이지요. 


1648년 신성로마제국


한편, 영국에서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여왕이 있습니다. 여왕이 있는 곳에서는 살리카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현대에 이르러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룩셈부르크에서 살리카법이 폐지되었습니다. 아직 딱 한 곳만이 살리카법이 유지되고 있답니다. 리히텐슈타인 공가입니다. 굳이 살리카법을 말하지 않아도 남자만 권력을 독점해 온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기는 합니다. 조선이라고 별수없었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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