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말 내 편인지, 적인지 모르겠어
“못 빠져나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예빈이의 속삭임을 듣고 하윤이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말한다.
“반반 젤리 말이야... 너 말고도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 나랑 천서진 밖에 몰라.”
예빈이의 질문에 혹시라도 다른 친구들까지 피해를 입을까 봐 하윤이는 거짓말을 했다. 하윤이의 눈을 빤히 보던 예빈이는 씩 웃으며 돌아서며 말한다.
“뭐,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다만...”
예빈이가 하던 말을 멈추고 휙 뒤를 돌아보며 하윤이에게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한다.
“천서진이는 앞으로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겠지...”
예빈이의 말을 듣자마자 하윤이가 벌떡 일어나 예빈이를 향해 크게 소리친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응? 어떻게 여기서 춤이라도 춰 줄까?”
순간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깜짝 놀라 하윤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처음 보는 하윤이의 모습에 친구들은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하윤이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예빈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하윤이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손을 잡았다. 예빈이가 손을 떼자 하윤이의 손에는 작은 메모가 하나 쥐어졌다. 예빈이는 가소롭다는 듯 하윤이에게서 한동안 눈을 떼지 않더니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하윤이는 얼른 메모를 확인했다.
“오늘 2시 40분, 방과 후 1실 앞으로.”
6교시가 끝나자마자 하윤이는 가방을 메고 본관 3층에 있는 방과 후 1실로 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서진이와 함께 방송댄스 수업을 방과 후에 듣던 교실이었지만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빈 교실로 변해버렸다. 빈 교실은 부피가 큰 수업 교구들로 가득했고 하윤이는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에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너 혼자 온 거 맞지?”
교실 한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빈이었다.
“응, 맞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하윤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서진이의 일은 유감이야. 아까는 보는 눈이 많아서 내가 조금 오버했어. 미안해.”
예빈이가 교실에서 와는 조금 다른 제스처로 하윤이를 맞이했다. 아까 봤던 표독스러운 얼굴은 다소 사라지고, 목소리도 전보다는 좀 더 온화해졌다. 아까는 나를 분명 적이라고 생각하고 사납게 말했던 예빈이의 태도가 달라지자 하윤이는 놀라우면서도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욕심을 부려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아니면 양피지에 제대로 소원을 적던지...”
“뭐? 예빈이, 너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
“야. 김하윤. 순진한 척하지 마.”
예빈이가 먼지 덮인 오래된 축구공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을 본 하윤이는 눈이 왕방울만큼 동그래졌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하윤이가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것을 예상이나 한 것처럼 예빈이가 씩 웃으며 말한다.
“왜? 설마 처음 보는 물건이야?”
예빈이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에 쥔 물건을 하윤이의 코 앞에 최대한 가까이 가져갔다. 그것은 윤표샘의 교실에서 보던 반반 젤리 케이스였다.
“그래. 맞아. 나도 윤표샘으로부터 반반 젤리를 받고 있어. 아마 받은 지 3개월은 넘은 것 같아.”
놀란 얼굴을 하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하윤이를 바라보며 예빈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너도 분명 윤표샘이 준 양피지에 소원을 적었을 테고...”
말을 하던 도중에 예빈이가 젤리 케이스를 열자 젤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후드득 떨어져 나왔다. 젤리의 양이 케이스에 비해 너무 많아 다시 주워 넣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윤이는 바닥에 있는 젤리를 하나하나 주워 먼지를 털어 케이스 옆에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그리고 너도 젤리를 소원 발효 12시간 전에 시간을 재서 먹었겠지? 그런데 서진이는 소원이 완전 반대로 이루어지고 너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거야.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 솔직하게 믿어도 되는 걸지, 아니면 윤표샘 편에서 내 정보를 들으려고 하는 스파이일지...’
"나 스파이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마치 하윤이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예빈이가 하윤이에게 먼저 선수를 쳤다.
“... 아마 양피지에 소원을 적지 않고 젤리를 먹어서 그런 부작용이 생긴 것 같아.”
하윤이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예빈이에게 말했다. 그런 하윤이의 모습을 보고 예빈이는 싱긋 웃으며 젤리 케이스를 담고 먼지 투성이인 매트에 털썩 앉았다. 매캐한 먼지가 공기 중에 튀어 오르자 하윤이는 손사래를 치고 기침을 했다.
“난 이제 더 이상 이런 먼지 같은 거 무섭지 않아. 무한한 거래를 할 수 있으니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예빈이가 무언가에 홀린 듯 나지막이 말했다.
“너 젤리 먹고 나서 시험 문제 풀던 날 기억나?”
예빈이가 하윤이에게 묻자 하윤이는 시험을 보던 그날 그곳을 떠올렸다. 학원 레벨 테스트를 6시에 본다는 사실, 그리고 시험 직후 친구와 답안지를 바꿔 채점하니 100점을 맞았다는 사실만 떠오를 뿐이었다. 시험 시간 1시간 동안 있었던 일이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 그러고 보니 시험 시작과 끝만 기억이 날뿐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잘 모르겠어.”
하윤이가 말하자 예빈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니 몸에서 거래 물질이 빠져나갔을 테니.”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야. 김하윤.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절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야. 현실이야. 알겠지?”
예빈이가 벌떡 일어나 하윤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하윤이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윤이는 순간 잔뜩 긴장해 입도 뻥끗 못하고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반반 젤리를 먹고 12시간 뒤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대신에 너의 몸에서 반드시 한 가지의 감각이나 신경 물질이 손상을 입게 돼. 양피지에 소원을 쓰면 윤표샘이 보통은 어떤 감각 부위로 거래할 것인지 물어봐. 그런데 묻지 않았다는 것은 왠지... 그날 윤표샘에게 필요한 것이 대뇌 피질 어느 한 부분이었을 거고 네가 그걸 활용하는 소원을 빌 거라는 걸 알았겠지.”
“그럼 내가 수학 시험을 보는 1시간 동안의 기억이 없는 게...”
“맞아. 넌 그날 소원을 이루는 대신 대뇌 중에서도 측두엽 기능을 거래한 셈이겠지.
학습 능력을 향상하는 대신 기억을 잃었으니 말이야.”
예빈이의 말을 막상 듣고 나니 예빈이가 오히려 나와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예빈이는 조곤조곤하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윤이나 서진이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굳이 그런 얘기를 왜 이런 먼지 나는 곳에서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윤이는 그래도 문득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물어보았다.
“그럼... 예빈이 너는 윤표샘이랑 무엇을 거래했어?”
하윤이가 묻자 예빈이가 미간을 잔뜩 움직인 채 미소를 띠며 말했다.
“흥미로운데.”
그렇게 짧게 한 마디를 뱉은 예빈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매트 옆에 굴러다니는 배트를 집었다.
“바로 이거.”
다시 짧게 한 마디 뱉던 예빈이는 먼지 나는 매트를 마구 내리 치기 시작했다. 대여섯 번 정도 쳤을 뿐인데 눈에도 훤히 보일만한 먼지들이 교실 여기저기에 마구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예빈이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기도 전에 먼지로 인해 하윤이는 정신없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런 하윤이와는 달리 예빈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윤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차분하게 앉아 기다려주었다.
“야. 정예빈. 너 이게 뭐 하는 거야. 먼지 때문에 숨도 못 쉬겠잖아. 아우. 목 아파.”
그러자 예빈이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