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은 조용할지라도 누구보다 단단하다
20여 년 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당시 MSN이라는 메신저가 또래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행이었다. 뭔가 학창 시절에 쓰던 지니, 버디버디와는 다른 세련됨과 전문가적인 분위기가 묻어났고 대학생 정도면 이런 비즈니스적인 메신저를 써야 되지 않나라는 귀여운 착각의 발로였으리라. 새내기다 보니 선배들에게 잘 보이려 연신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써가며 많은 선배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갔다. 그 뒤에 내가 선배가 된 뒤에도 상태창에 '다정한 윤표 씨'라는 멘트를 써가면서 믿음직스러우며 친절한 사람임을 공언하기 바빴다. 세월이 흘러 직장생활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니 나의 가치관도 자연스레 바뀌었고 그 속에서 내린 하나의 결론이 있다. 다정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그들은 결코 요란하지 않다는 것.
이해인 작가는 이와는 달리 다소 요란스러운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 밑에서 온전히 자란 것이 아니라 친척 집을 전전하며 어린 나이부터 불안함과 외로움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이었지만 그걸 딛고 일어나 그녀는 남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 때부터 회사의 리더가 되었다. 회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과 타고난 리더십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거쳐온 그녀가 내린 결론은 결국 사람을 남기는 것은 말이요 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태도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말과 태도에 다정함이 묻어있는 자가 나를 오롯이 다스릴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남들과 더 현명한 연결고리를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커리어 속 여러 가지 굴곡들을 다정함이라는 가치관과 꾸준함이라는 신념으로 묵묵히 그리고 서서히 헤쳐나가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저서에 고스란히 수놓았다. 기왕 직장 생활하는 거 어떠한 태도로 업무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 알려주는 상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번 엎어지고 넘어져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야 좋을지를 따뜻한 위로와 함께 짚어주는 인생 선배의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나름 15년 차 교사이지만 직장생활에서 남의 시선에 좀 더 집중하고 아쉬운 소리 하기 전에 알아서 혼자 업무를 끝내는 부장교사의 입장에서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보기보다 더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사람과 세상이기에.
솔직히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느 순간부터 '꼭 해야지' 나 '꼭 돼야지'라는 목표가 없어졌다. 굳이 목표라고 한다면 직장에서 출퇴근, 업무 처리, 보고서 작성 및 결과 보고 및 환류와 같은 내가 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들을 해내는 것 정도. 왜냐하면 그 일련의 과정에서 소모되는 감정이나 체력적인 에너지가 상당하기 때문에 구태여 일을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걸 해내지 못해서 얻게 되는 스트레스는 또 어찌 감당해야 하나라는 심정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름의 끈은 유지하고 결은 간직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늘 못하면 내일 또 하고 내일 못하면 1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면 되니까',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나으니까' 같은 것들 말이다. 꾸준하게 묵묵히 하다 보면 서서히 길이 나올 것이라 믿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굳이 되고 싶은 목표가 하나 있다고 한다면 멋진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 만족할 줄 알고 주어진 오늘에 감사할 줄 아는 삶. 얼굴 찌푸리지 않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좋은 글을 필사하고 새벽에 한숨 달릴 줄 아는 삶. 돌아오면 반기는 가족이 있고 가족들이 아빠를 믿어주는 삶. 학생들과 늘 행복할 수 없겠지만 서로 지킬 것을 지키며 배움과 나눔이 공존하는 그런 삶 말이다. 나를 마주하는 사람에게 먼저 내가 다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나를 오롯이 인정하고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자존감이다. 다정함 속의 단단함을 바탕으로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인생이란 계단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