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주인 할머니를 직접 볼 일은 없었다. 다만 중간에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집주인에게 연락할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집주인이 당부한 것처럼 옥샘 부동산 사장과 연락해서 해결을 했다. 옥샘 부동산 사장은 짧은 커트 머리에 싹싹한 여자였다. 옥샘 부동산 사장은 집주인이 송금한 돈으로 수리 비용을 지불했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처럼 집주인이 이상하거나 고약한 노인네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은수는 그 후로 집주인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날 때가 다가오자 은수는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르막이 심한 것도 문제지만 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언제나 숨을 헐떡이며 올라와야 하는 오르막도 지긋지긋하고 음울한 동네 분위기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파트 후문으로 나가서 좁은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면 초등학교가 나왔다. 학교로 가는 골목이 좁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서 낮에도 적막감이 감도는 길이었다. 그 길을 어린아이가 혼자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 나쁜 사람을 만나거나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상상에 이르면 은수는 오싹함을 느꼈다. 이렇게 불안감에 시달리느니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를 가는 것이 맞다 싶었다.
우선 새로 들어올 세입자를 구해야 했다. 은수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겠다고 연락을 했다. 대대적인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은수는 베란다에 쌓아 두었던 낡은 박스와 잡동사니를 정리했다. 베란다가 말끔해 지자 집이 밝아졌다. 은수는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욕실 타일을 일일이 박박 문지르며 닦아내자 낡은 타일에서 제법 묵은 때가 벗겨져 나왔다.
50대 중반쯤 된 부부가 집을 보러 왔다. 남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그는 배려가 몸에 밴 사람 같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거침없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양해를 구한다는 말을 하고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먼저 거실을 둘러보고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 봤다. 물은 싱크대 수전에서 쏴하고 쏟아졌다. 그는 아마 수압을 체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햇빛이 잘 드네요. 집이 밝고 환해서 좋습니다. "
그는 베란다 앞에 서서 창 밖을 바라봤다. 이 집은 3층이었다. 그러나 앞 쪽으로 워낙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5층이나 6층 정도 높이가 될 것이다.
"거실이 널찍해서 테이블을 놔도 될 것 같은데"
남자는 크기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자신의 팔을 양 옆으로 펼쳤다. 20평의 거실이 널찍하다니. 은수는 그 남자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번도 거실이 넓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남자는 거실이 넓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표정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남자는 이 집에 어떤 기대감과 설렘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안방을 건성으로 보고 나오더니 바로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가계약금으로 100만 원을 입금했다. 이제 집주인과 계약날짜를 잡고 정식으로 계약서만 쓰면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될 터였다.
집을 청소하고 보여주는 것부터 세입자를 구하는 것까지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거라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이제 큰 걱정거리는 해결한 셈이었다. 남은 일은 이사 날짜를 정하고 이삿짐 업체를 알아보는 것 정도였다. 은수는 모처럼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꿈도 꾸지 않고 밤새 곤히 단잠에 빠졌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골치 아픈 일들이 해결된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집주인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부동산 사장은 집주인과 통화를 했다고 했다. 집주인은 핸드폰이 없기 때문에 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 사장이 계약 날짜를 알려 주고 나오라는 말을 하자 할머니는 대답도 않고 가만히 듣고 있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로 집주인은 지금까지 내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동산 사장이 전화를 걸어와서 은수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은수에게 직접 연락을 한 번 해 보라고 말했다. 처음에 은수는 그러겠다고 순순히 대답을 했다. 핸드폰 없이 집전화만 있으니 연락이 잘 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다. 낮에는 일하러 나가거나 집을 비우는 거겠지. 그러니 부동산 사장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집주인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전화를 걸어보니 역시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은수는 저녁이나 늦은 밤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사람이 있다면야 받지 않고 배기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 징글징글하도록 전화벨이 울려댔다. 그래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 번은 새벽 6시쯤에 전화를 걸어 본 적도 있었다. 역시 헛수고였다. 전화가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전화번호가 맞는지 부동산 사장이 여러 차례 확인을 했으니 번호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가설은 두 가지였다. 집주인이 집에 없거나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일이 이렇게 이상하게 꼬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은수는 머리가 복잡했다. 저녁을 먹고 식탁을 치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가계약금을 입금한 남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움츠러 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어온 용건을 털어놨다.
" 계약을 파기하고 싶습니다. "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남자는 힘겹게 말을 꺼내고는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허둥대고 있었다.
" 혹시 제가 보낸 가계약금 중에 일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원래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만"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고심하며 선택하고 있었다. 그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말투였다. 혹시라도 은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은수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일이 복잡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은수는 이미 이사 갈 집 계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여기에서 이렇게 계약이 파기되고 일이 틀어지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은수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걸어온 남자에게 한숨을 쉰 것도 아닌데 수화기 너머에 있는 상대방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
" 아니에요. 주인하고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시죠?"
" 네, 그렇습니다. 불안해서"
" 집주인 할머니가 나이가 많고 답답해 보이지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고 잘 고쳐 주셨거든요."
은수는 그의 불안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 제가 집주인을 찾아볼게요. 만약에 집주인과 계속 연락이 안 되면 가계약금을 전부 돌려 드리겠습니다"
은수의 말에 세입자는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가계약금은 법적으로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계약자들은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가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아마 세입자도 은수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 큰 기대를 갖고 전화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나 사정을 하면 일부라도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연락한 것일 거다. 그런데 은수는 가계약금을 다 돌려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입자는 마음이 흔들렸다. 계약이 파기되면 가계약금을 기를 쓰고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것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세입자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은수는 집주인을 찾아야 했다.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은수가 직접 집주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부동산 사장으로부터 주소를 받았다. 집주인의 주소는 금호동 1가 750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