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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02. 2020

촌지를 들고 교문을 통과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학교라는 곳에 간 아이는 서툴렀다. 사실 아이보다 더 서투른 건 부모였다. 학교에서는 서투른 학부모를 위해 친절한 안내문을 보냈다. 아이가 준비해야 할 준비물 목록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는 일체의 선물을 받지 않으며 음료수도 되돌려 보낸다는 내용도 있었다.

 

 남편과 나는 감회에 젖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치맛바람이라는 용어가 공공연했다. 아빠가 사업을 하는 수근이는 선생님들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기도 했다. 나처럼 학교에 엄마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지 않고서는 푸대접받기 일쑤였다.

"얼마나 서러웠던 시절이야. 그치?"

우리는 근절되어야 할 악습이 사라졌다고 감격했다. 그리고 이제야 학교와 학부모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뿌듯해했다.


   아이는 입학하자마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큰 눈에 벙실벙실 웃기만 하고 말도 없는 녀석인데 학교에서는 선생님 애간장을 태웠다. 아이는 발표를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가 막상 자기 차례가 오면 일어나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앉아 버렸다. 이제 1년 남은 퇴임을 준비하던 선생님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적개심까지 보였다. 남편과 나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은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준비되지 않은 부족한 아이를 학교에 보내서 죄송합니다'로 시작해서  '아주 작은 칭찬이라도 부탁드립니다'로 끝이 나는 메일이었다. 남편은 길지 않은 편지를 쓰는데도 몇 번이나 지웠다가 다시 쓰는 눈치였다. 가끔 메일을 몰래 훔쳐보면 어찌나 공손하고 애절한지 비굴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남편이 화난 선생님을 달래기 위해 메일을 보내는 대신 나는 교실 청소에 매달렸다. 학교는 매주 토요일마다 엄마들이 와서 청소를 하게 했다. 그리고 엄마가 청소를 다녀간 아이들은 칭찬 스티커를 받았다. 칭찬 스티커가 칠판에 쭉 전시되어 있으니 아이들은 서로 많은 스티커를 받으려고 안달이었다. 대표 엄마가 격주에 한 번씩 교실 청소를 오라고 했지만 나는 매주 나갔다. 그렇게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엄마들이 제일 하기 싫어하는 쓰레기통 비우기나 밀대 빨기를 자청했다.


 그렇게 남편이 절절한 여러 통의 메일을 보내고 내가 교실 청소에 이골이 날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동네 엄마들 물놀이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일하는 엄마는 그런 모임에 끼기 쉽지 않은 법인데 나는 운이 좋았다. 엄마들 중에 직진만 겨우 하고 주차는 못하는 초보 엄마가 있었다. 다들 그 엄마 차 타고 이동하는 걸 겁냈는데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나를 보고 적임자라 생각한 것이다. 사실 나의 운전실력은 최고였다. 나는 급경사에서도 엄마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핸들링을 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들의 장거리 물놀이에 끼게 되었다. 처음으로 친구들과 가는 물놀이에 아이들은 흥분했고 처음으로 엄마모임에 초대받은 나도 한껏 고무되었다. 나는 엄마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새벽부터 김밥을 손수 말고 커피도 인원수대로 준비했다.

 

 다들 청소하면서 안면은 익힌 터였고 보채지 않고 물놀이하는 애들 덕분에  엄마들은 금세 친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한 엄마가 미국 여행 갔다 온 얘기를 했다. 미국에는 영양제와 그릇이 싸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한테 그릇세트를 선물했는데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한 엄마가 비밀을 털어놓자 그다음부터는 술술이었다. 어떤 엄마는 선생님 연령대에 맞는 영양제를 선물했더니 또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거다. 어떤 엄마는 한정판 악세사리를 구해서 드렸다고 했다.


세상에. 나는 이제까지 아무것도 갖다 주지 않았다고 하자 나이 많은 엄마가 안타까워했다.

"애가 말썽도 많이 부린다고 그러던데. 선생님이 섭섭했겠어요. "

나는 선생님을 섭섭하게 만든 답답한 엄마가 되어 버렸다. 집으로 온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남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니 놀라면서 불안해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해 온 뭐랄까 통념! 뭐 그런 걸 무시한 거야? ' 남편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은 나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선물을 사서 선생님께 마음을 전하자고 했다. 나도 의기투합했다.


   50대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홍삼 제품을 샀다. 커다란 빨간 쇼핑백에 넣으니 제법 고급스럽다. 나는 회사에 반차를 쓰고 선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정문을 통과했다. 교실문을 드르륵 열었는데 이미 수업은 끝났는지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교실에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선생님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슬슬 자신이 없어졌다.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나를 훈계하던 선생님을 볼 생각을 하니 다시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 굳이 얼굴을 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중요한 것은 선물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폭탄을 설치하고 현장을 빠져나가야 하는 군인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처음에는 선물을 교탁 아래에 넣었다. 그런데 혹시 발견 못하고 갈 수도 있고 그러면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나는 잘 보이는 교탁 위에 선물을 올려놓았다. 센스 있게 아이 이름을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 놓고 나왔다.


 나는 묵은 숙제를 해결한 것처럼 홀가분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그런데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선생님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 어머니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일부러 이런 거예요? 뭐예요? 어서 와서 선물 당장 갖고 가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초조하고 다급했다. 나는 쏜살같이 학교로 달려갔다. 집은 학교 코앞이었으니. 나는 다시 교실로 들어가서 빈 교실 교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홍삼 박스를 들고 내려왔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선물이 뭐가 잘못된 건가? 다른 사람들 것은 다 받았다는데 왜 내 것만 안 받는 거야? 투덜대며 집으로 내려왔다.


나중에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지인에게 그 날 일을 얘기했더니 지인은 황당해했다. 나처럼 촌지를 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아마 그 날 선생님은 내가 교육청에 고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가끔 홍삼 박스를 어깨에 메고 학교로 향하던 나를 생각하고 웃음이 난다. 퇴임 후에 봉사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던 그 선생님은 그때 나의 노골적인 선물에 얼마나 놀랐을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생각만큼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사진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36&aid=000001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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