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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03. 2020

비가 온 후에는 계절이 바뀔 것이다.

  창문이 무섭게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다가 그만 잠이 깨버렸다. 새벽 5시 30분이다. 남편은 6시에 회사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바람이 어찌나 거칠게 불어대는지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오니 남편이 놀라는 눈치다. 오늘 같은 날 휴가 내야 하지 않냐고 하니 비 온다고 어떻게 휴가를 내냐고 핀잔을 준다. 맞는 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끔찍한 순간에도 지각을 걱정했다. 벌레로 변한 몸으로 어떻게 시간 내에 기차를 탈 수 있을지를 고민했으니 밥벌이의 존엄함을 말해 뭣하랴. 어쨌든 나는 셔틀버스 타는 데까지 남편을 데려다 줄 생각이다.

"당신 출근 걱정 때문에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지다니. 정말 사랑인가 봐. "

내 말에 남편이 대답한다.

"참 곤란한 일이네"

 남편의 이런 화법이 나는 좋다. 남편을 셔틀 승강장 앞에 내려놓고 차를 돌린다. 남편은 비 오는 날에만 신는 싸구려 등산화를 신고 있다. 큰 맘먹고 산 주황색 배낭도 어느새 낡아져서 등 뒤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신호를 받고 유턴을 하고 가는데 반대편에 남편은 아직도 서 있다.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남편이 타고 갈 버스는 어디까지 왔을까?

  

  아침 공기가 차가워진걸 보니 계절이 바뀔 모양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을 다니며 공채시험을 준비했다. 학원시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강의실마다 몇백 명이 수업을 들었는데 층에 화장실은  칸이었다. 그나마도 한 칸은 고장으로 잠겨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수십 명이 화장실 밖까지 길게 줄을 섰다. 그러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우리는 미처 배설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채 초조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게다가 의자는 여러 명이 같이 앉는 기다란 의자였다. 다섯 명이 앉아 있다가 한 명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다들 다리를 몸 쪽으로 최대한 붙여서 나갈 공간을 만들어줬다. 이래저래 품위유지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젊음의 낭만은 꿈꿀 수도 없었다.


 

 강의실에는 이십 대가 대부분이고 가끔은 삼십 있었다. 개강 초 강의실은 절박한 표정의 사람들로 가득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합격하거나 공부를 포기하고 떠난 사람들로 비워졌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동물처럼 무감각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제일 앞자리는 명당이었다. 앞자리를 맡으려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버스를 타고 와야 다. 그러다가 한 번은 인적 없는 버스승강장에서 변태를 만났다. 재킷 차림에 깔끔해 보이는 변태였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갑자기 느낌이 이상해서 돌아보니 변태는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채 자신의 중요한 물건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변태는 만족한 얼굴로 옷을 입고 사라졌다. 나는 변태에 대한 공포심보다 내 신세에 대한 서러움 때문에 눈물이 나왔다. 다행히 그 변태와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났다.  


  삶이 이렇다 보니 계절의 변화에 무감각해졌다. 계절의 변화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나는 소포 하나를 받았다. 계란꽃 사진과 짧은 편지였다. 편지는 계절이 바뀌고 있다고, 같이 걷던 길에는 계란꽃이 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사진과 편지를 보고 오래 울었다. 계절이 무심히 지나가는 게 서러웠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내 젊은 시절이 두려웠다. 그리고 지나가는 계절을 잠깐 붙잡아서 나에게 보내준 그의 짧은 글귀가 나를 울컥하게 했다. 나는 그러고도 꽤 오랫동안 빈 방에서 혼자 울었다.


계란꽃 사진은 진작에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그 기억은 이렇게 오래 나에게 남아 있다.


아침 공기가 꽤 차가워진걸 보니 이제 정말로 계절이 바뀔 모양이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jejuyou/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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