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임신 그리고 유산

왜 하필 나일까

by 유맹

내 입으로 말하긴 웃기지만 꽤 오래 소소하게 기부를 해왔다. 3곳에 야금야금 나눠서 월 8만 원 정도를 내고 있는데 그중 가장 관심을 쏟는 곳이 아동을 후원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린 친구들을 후원하는 걸 선호한다고 하여 나는 가장 후원이 필요한 아이로 선택을 했는데 장애가 있는 고등학생 남자아이였다. 가끔 NGO측에서 이벤트성 후원감사 메시지 같은 걸 보내주는데, 보통은 귀여운 그림이나 삐뚤빼뚤한 어린아이 글씨체로 편지가 오는 걸 기대했다면 내게는 그 아이의 엄마가 쓴 메시지가 온다. 아이를 어떻게 길러오셨는지, 아이의 일상은 어떠한지 그런 평범한 얘기들이다. '귀여워~'하면서 볼 그림이나 글씨체는 없지만 "엄마"라는 역할의 책임감과 위대함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올해 어린이날에는 아이가 갖고 싶다는 가방을 고이 포장해서 선물로 보내주었는데 어쩌다보니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직 준비도 하지 못했다. NGO를 통해 전달해야 하는 방식이라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날에 아이들의 기운을 듬뿍 받으려고 평소 후원하던 아이 외에도 보육원에 있는 친구가 갖고 싶다는 요괴워치 카드도 선물로 보냈다. 이 모든 건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내가 복 받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무교인 내게 후원하는 행위는 일종의 종교와도 같은 의미였다.


지난 브런치글을 임신 7주에 썼는데 그 직후에 유산판정을 받았다. 하혈이 멈췄길래 이제 좀 안정기로 가나보다 했는데 그 피들이 자궁 내에서 굳어버렸단다. 그렇게 순식간에 아기집이 쪼그라들었고 더는 아기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흔히 듣는 '아기 심장이 멈췄네요.' 이런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인가 싶었다. '엄마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대문자 T 같아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그날만큼은 조금 F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짧은 기간 사이 몇 번의 위기를 넘겨서인지 유산했다는 말을 듣는데도 덤덤했다. 피가 꽤 많이 굳어있어 자연배출, 약물배출로는 유산이 어렵고 소파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뭐든 상관없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문득 억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누구한테 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혼자 씩씩거리며 나오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이 크고 유명한 난임병원에서 나만 유산한 것도 아니고 나만 힘든 것도 아닐 텐데 병원 대기실은 항상 참 조용하다. 다들 어떻게 잘 참아내는 걸까. 수술 날짜를 잡기 위해 상담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더니 조용히 상담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갑 티슈를 내밀었다.


"이럴 땐 소리 내서 울어도 돼요."


갑자기 찾아온 유산도 아니었고 이미 울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이틀 뒤 수술을 받게 되었다. 유산확정 다음날, 그러니까 수술 전날 꽤 많이 걸었다. 사실 살짝 뛰기도 했다. 2주 넘게 누워 지내다 나왔더니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래, 다시 아이를 받을 힘을 길러야지!' 이런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소파술은 인터넷으로 찾아본 것보다, 주변의 후기보다 매우 아팠다. 간혹 출산 때 느끼는 진통이 오기도 한다는데···. 난자채취 때도 진통제 없이 퇴원했던 터라 소파술도 수술 직후에 아프지 않길래 진통제를 거절했었다. 그러다 뒤에 통증이 와서 부랴부랴 진통제를 맞고 퇴원을 했는데 약빨이 안 받았던 건지 정말 3시간 동안 지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평생 느껴본 통증 중 가장 아팠다고 확신한다.


소파술 통증이 너무 심해서 수술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다시 병원을 찾아서 수술경과를 확인했다. 당장 다음 생리부터 다시 시험관을 준비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단다. 찌꺼기 하나 남아있지 않다며 다시 대문자 T로 돌아온 선생님이 몹시 기뻐하셨다. 기뻐해하는 일이 맞는데···.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산한 게 다시금 실감이 났다. 수술 후 회복한다고 쉬면서 유튜브를 많이 봤는데 어느 산부인과 선생님이 그랬다.


"소파술은 단순히 수술일 뿐이에요. 아이와의 이별은 부모의 몫입니다."


6주 5일쯤이었나, 그때 의사 선생님이 오락가락하지만 아이 심장소리도 들리고 희망이 보이니 이 고비만 잘 넘겨보자고 그러셨다. 그전까진 초음파 어플에도 아이가 '아이1'로만 저장되어 있었는데 그날 '고동이'라는 태명을 지어주었다. 시험관은 어쩔 수 없이 임신 극초기부터 내가 임산부인 걸 알게 되는데 그냥 그때부터 태명을 지어줄 걸 후회했다. 배에 품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불러줄걸. 그렇게 '고동이'란 태명을 유산 후에 더 많이 부르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유산은 내 탓이 아니며 단순히 배아의 염색체 문제고, 이건 마치 자연재해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그럼 나는 또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왜 하필 나야?' 평소에 선행이라면 앞장서서라도 하려는 사람인데 왜 나야? 어느덧 나이가 나이인지라 요즘 들어 친구들의 출산, 임신소식도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도 한 친구가 임밍아웃을 하며 내년 6/19 출산일을 알려왔다. 나도 원래대로라면 6/20 출산예정이었는데, 입에서 맴도는 말을 삼켜냈다. 친구는 계획하지 않았는데 덜컥 임신이 되었다며 머쓱해했다. 카톡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그렇게 또 엉엉 울었다.


병원을 자주 간 덕분에 초음파 사진을 5장이나 갖게 되었다. 주사, 임신 테스트기, 초음파 바코드 같은 건 쉽게 버렸는데 사진은 차마 못 버리겠더라. 그리고 지난 주말 오랜만에 작동시킨 화목난로에 사진을 넣었다. 그것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부탁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시험관 1차에 착상이 된 게 어디냐며, 착상이 된 건 임신이 가능한 몸이라고, 유산 후에 오히려 아이가 잘 들어선다고 그런 얘기들을 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결혼 9년 차에 가지게 된 아이라 너무 들떴나 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싶다. 고동이 너를 품고 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평생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고. 너는 너무 고마운 존재였다고. 그러니 우리 다시 곧 만나자고. 정말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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