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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선 Mar 25. 2022

노란 집

6)

 

추적거리며 후덥지근하던 여름이 지나면서 바람이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민준이의 그림자는 가는 계절 따라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서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믿음이 미련처럼 남아서 기다림을 간직하게 되지만 죽음에는 그런 간들거리는 미련마저 싹 걷어가는 것 같이 민준이는 지워지고 있었다.
 친정에 한 번씩 올 때마다 준희와 홍연이의 붙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늘 이름 못할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둘은 자주 티각태각 했고 그런 둘의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을 때면 잔소리처럼 헤어져라는 말을 하군 했다.
 “준희야, 그냥 헤어져~ 그렇게 홍연이와 민준이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애를 괴롭힐 거면 왜 시작했 어?”
 “미칠 것 같아! 자꾸 쟤만 보면 민준이랑 서로 좋아했던 그런 상상을 하게 돼 잔아. 그때마다 홍연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증오로 변해버려! 그래서 두려워! 그냥 목을 졸려서 죽이고 싶어! 웃으면서 다가오면 더 가증스러워. 민준이 앞에서도 저렇게 요염을 떨면서 웃었겠지 하는 생각에 토할 것 같아!”
 가끔씩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 거리는 준희는 바닥이 드러난 자존감마저 팽개치고 저속한 말을 아무렇게나 널어놓는다.
 “미친 자식! 걔네 둘 결혼까지 하려고 했던 거 모르고 시작했 어? 왜 이제 와서 지랄병이야? 그러니  헤어지라고 애를 말리지 말고!”
 준희 입에서 죽이고 싶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준희의 그 고통을 다 들여다보지 못한 것으로 늘 미안하고 가슴 아팠지만 하루하루 말라가는 홍연이의 창백한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자꾸 그녀에 대한 연민 때문에 밴댕이 속 알 딱지 만한 준희의 비틀어진 속내만 죽도록 미워했다.
 “어쩌면 좋아! 자꾸 옛날 얘기를 꺼내서 미칠 것 같아!”
 “둘은 그냥 친구로만 남았어야 했는데...”

혼잣말로 중얼중얼 말해놓고도 홍연이 앞에서 주책없이 실언을 해서 애 마음을 다치지 않았나 눈치를 보는 윤희  앞에서 속내를 감추지 않고 두서없이 속을 까고 있는 홍연이 불안한 얼굴은 밝음을 잃었고 어두운 공포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끔은 마귀가 씌운 것 같아서 무서워! 미칠 듯이 술을 퍼 마시고 목을 졸리고 울었다 웃었다 죽도록 패고는 더는 못 살 것 같다고 하다가 술만 깨면 무릎 꿇고 울면서 미안하다고 빌어. 같이 돌아버릴 것 같아!”

그렇게 곱고 맑던 얼굴이 누르끼리하고 콧등에는 까만 기미까지 여러 개 생긴 것 같았다. 전보다 야위여서인지 더 커진 것 같은 두 눈에는 두려움 때문인지 아님 말 못 할 걱정 때문인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근데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뭐 야! 뭐가 너네 둘을 이렇게 묶어 놓고 있는 거야?”

“임신했어! 준희가 알면...”
 손에 들렸던 방울토마토의 그릇이 떨어지며 작은 토마토들이 또르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귀가에는 웅 웅 거리는 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혀를 잘라버렸는지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홍연이의 그 얼굴, 그 뒤로 증폭해버릴 것 같은 준희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애가 민준 애라는 것을 홍연이의 그 피기 하나 없는 얼굴이 말해주는 것 같아서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다.
 “민준이 애야?”
 “죽고 싶어!”
 “너는 그 재수 없는 입이 문제야! 맨날 죽음 죽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괜히 행복해서 이 모든 것을 잃을 가봐 걱정하던 그때의 홍연이가 떠올라서 짜증이 났다. 꼭 마치 민준이 죽음이 그 방정맞은 홍연이의 입 때문에 벌어진 것처럼 그녀를 원망스러워했던 그때보다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그녀가 더 가증스러웠다. 어쩌면 넌 끝까지 준희를 이렇게 아프게 할 수가 있을 가?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었다. 도저히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허둥거리는 홍연이가 참으로 바보스럽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다. 이름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발랄해서 남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싣고 다니던 세상 부러운 거 없이 살던 그녀, 자기가 앞에 일은 누구보다도 똑 부러지게 하던 그 친구는 사라졌다. 지금 그녀는 또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실의에 빠져 가쁜 숨을 톱 고 있었다. 살고 싶은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 않고 뒤엉켜버린 지금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도 도저히 이 상황이 감당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랑으로 인해 넘치던 행복을 잃을 가봐 울고 웃던 그녀가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변질된 집착이라는 그 질기고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는 알 수 없는 병적인 사랑의 감정에 시달려 고되고 피폐한 생의 고달픔에서 해탈되고 싶어 할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임신이라니? 질긴 인연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큰 파장으로 다가왔다. 민준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짧은 인생이 허무해서 홍연이의 몸속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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