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희선 Oct 05. 2021

삶며 다독이며

감나무

감나무


사진 출처/ 인터넷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한결 부드럽게 가벼워지는 걸 보니 가을이 오나 봅니다.
한풀 꺾인 불볕더위는 탱글탱글 영글어가는 열매들에 마지막 햇볕 한올 마저 쏟아부어 단즙을 만들려는 듯 열매들의 얼굴을 하나같이 쟁글쟁글 쓰다듬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 간혹 불어오는 갈바람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말라가는 잎새들의 김 빠지는 소리가 그 잎새에 엎드려 우는 귀뚜라미 소리와 어울려 현악기의 처량한 운율을 연주하고 있는 이 가을은 그 누가 불러주던 쓸쓸한 노래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게 합니다.
강 건너 저편에 홀로 선 감나무는 붉은 홍 씨에 불을 지펴 가지마다 초롱불을 대롱대롱 걸어놓고 길목에 묵묵히 서서 갈대숲의 술렁임을 듣고 있습니다.
깊어가는 밤, 홍 씨의 주머니마다엔 옹기종기 갈대들의 속삭임이 빨갛게 익어가고 가을 초승달은 쓸쓸한 숲에 하얀 은가루를 자잘히 뿌리고 있습니다.
긴 밤, 길 잃을까 걱정이신 어머니께서 걸어놓은 초롱불은 새벽까지 빨갛게 타다가 가을날 아침 풍선처럼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을 조금 더 베여다 가을날의 둥근 이야기 하나를 꼭 품고 더 붉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소싯적 고향을 떠날 때 베어놓고 온 사랑 한 줌을 거기에 동여매 놓고 그렇게 떠난 그 길을 다시 거슬러 가봅니다. 거기에 한없이 푸근히 웃고 선 어머니 모습이 갈밭에 흩어진 억새풀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어머니의 기다림은 강가를 따라 흐들어지게 이어져가는 갈대밭 끝으로 기러기떼와 함께 날아가고 어머니의 감나무는 저녁녘 어둠을 밀어내고 오늘도 초롱불을 켜켜이 켜들고 섰습니다. 길 잃을 걱정인 어미의 마음은 거기에서 빨갛게 타들어가는데 철새의 처량한 울음소리마저 잦아드는 가을밤의 산기슭에서 풀잎들이 비벼대는 소리가 사각사각 달빛을 베어 물고 바람에 찢기며 간간이 들려옵니다.
늦가을의 바람을 이고 선 감나무는 늘 어머니를 상기시킵니다.
홍 씨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어머니께서 저렇게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가는 골목마다 지키고 선 것을 보면 얼마나 반가워하실까요?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감나무는 거의 관상용으로, 가을 속의 풍경으로, 고향의 향수를 감수하기에 크나큰 위안을 주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나의 머릿속에 낙인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감나무가 어머니의 또 다른 형태로 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길가다 감나무를 보면 늘 가슴은 감격으로 차오릅니다.
살다 보면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들이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할 때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쓸쓸하고 허무맹랑한 정서적 파동이 파도처럼 여울쳐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면 누구도 없는 곳에서 펑펑 울거나 남 다 자는 밤중에 길목에 선 감나무를 찾아 줄기차게 달려가서는 한참씩 끌어안고 울곤 했던 그 시간, 감나무의 거칠한 가죽 위에 끈적이는 눈물을 한 움큼 빼고 나면 후련해지는 그런 날들, 감나무에 기대여서 한없이 인생의 힘든 사연들을 푸념처럼 널어놓고 오면 가슴을 누르던 사연들은 벌써 바람 타고 멀리 사라지고 막혔던 가슴은 뻥 뚫립니다.
이렇게 해마다 감나무에서 대롱거리는 노란 전등을 닮은 열매에 슬픈 이야기들을 한 묶음씩 담아서 묶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향하군 합니다. 홍 씨 하나에 이야기 하나, 홍 씨 두 개에 이야기 두 개, 하루 이야기는 가을바람의 풍요로운 입김을 받아서 더 붉은 감으로 익어가고 온 몸을 감고 있던 슬픔의 허울을 벗어던진 나도 더한층 영글어가는 듯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진 엉성한 가지 끝에 동글동글한 감들만 댕그러니 남아 가지마다 노란 향 등을 하나씩 켜들고 선 감나무에선 늘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매달려 회포의 이 계절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향수를 뿌려주며 그렇게 한적하니 깊은 가을 속에 훠이훠이 서있는 그 쓸쓸한 모습을 보면서 그냥  울적한 이 마음을 달래기에도 충분한 이런 가을이면 익어가는 감나무를 기다리고 이렇게 기대어 흐르는 삶의 무상함을 풀 수 있는 감나무를 만날 수 있는 가을이 좋습니다.
이제 곧 다가올 겨울날엔 까치의 밥으로 한 해를 마무리 짓겠죠. 누구에게는 정신적인 식량으로 작은 미물에게는 한 끼 아름다운 식사로 한그루의 감나무는 이 가을에 이렇듯 풍요로움을 선사하면서 뼈만 앙상하니 남은 채 마지막 초롱불을 밝히고 섰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시가 머무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