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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y May 07. 2019

좋은 일만 생각하기

2nd week in Dublin (22/04/19~28/04/19)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드디어 이스턴 홀리데이가 끝났다. 회사에 학교에, 사람들은 다시 바쁜 원래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도 지난 주에 미뤄왔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야 할 시간.


우선 어학원 등록하기. 한국에서도 이곳저곳 비교하며 찾아보다가, 일단 6월에 대학부설 아카데미로 옮기기 전에는 큰 품을 들이지 말자고 생각해 중저가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한 학원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Grafton Street과 St. Stephan Green 등 더블린 2 구역과 많이 멀지 않아서 좋았다. 학원에 도착해 등록을 하려고 하니 리셉션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신규 학생들을 받고 있어서 아무래도 본격적인 수업은 다음 주부터 듣는 것이 어떻겠냐는 답변을 받았다. 본의아니게 1주일을 더 놀게 생겼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학원에서 이번주에 등록하는 학생에 한해 특별 이스턴 기념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20만원 정도 저렴한 가격에 어학원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개이득!

그렇게 등록을 마친 나는 곧장 근처에 있는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로 향했다. 이유인즉슨, 학생의 신분임을 증명하는 '스튜던트 립카드(Student Leap Card)'를 만들기 위해서! 이 카드로 버스 한 번 타는 데 기본 3,500원 정도가 드는 악명 높은 아일랜드의 교통비를 꽤 많이 할인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드럭스토어나 레스토랑 등 학생 전용 디스카운트 행사를 하는 곳곳에서 금액을 절약할 수 있다. 카드 발급 절차는 어렵지 않아서 수월하게 클리어. 이게 얼마 만에 학생 신분이여!


(위쪽부터) 어학원 등록하러 가는 길에 처음 탄 2층 버스 / 트리니티 대학 전경




우연인 듯 필연인 듯


홈스테이 집 앞 근처 그랜드 캐널 부두 근처에는 큰 극장 하나가 있다. 바로 보어드 가이스 에너지 씨어터(Bord Gais Energy Theatre). 한국에서 홈스테이를 알아볼 때에는 이렇게 좋은 극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여기 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나니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만 되면 많은 사람들로 분주해지는 이 곳이 문득 궁금해져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무슨 공연을 하나 프로그램을 구경했는데 이런! 이번 주까지 영국 내셔널 씨어터에서 워호스(War Horse) 투어 공연을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깜짝 놀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Gosia에게 "아니! 집 앞 극장에서 워호스 투어가 오는 거 정말이야?"라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아! 포스터 봤니? 그거 극장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하는 거야! 관심 있으면 가서 봐! 걸어서 5분도 안 걸리잖아."라고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말도 안 돼. 조금 부풀려서 운명인가 싶었다.


Bord Gais Energy Theathre 앞 연극 War Horse 포스터


사실 나는 2014년 여름 영국-스페인-독일을 한 달 동안 배낭여행으로 다닌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런던에 있었던 8일 중 7일 동안을 매일 다른 공연을 보러 사방팔방 뛰어다녔었다. 그 공연들 중 하나가 바로 워호스(War Horse)였고, 무대 맨 앞에서 보던 나는 울고불고 감동먹고 했던 기억이 있다. 영어 때문에 혹시나 이해가 짧을까 싶어 한국에서 영화를 미리 보고 왔었지만, 무대에서 보는 스케일은 확실히 달랐다. 커다란 푸펫을 조종하는 출연진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직접 내는 울음소리에 따라 말들의 감정과 생각들이 세밀하게 전해졌을 때의 그 전율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운이 깊어 국립극장에 NT Live 상영을 했을 때에도 또 가서 봤었는데. 그 공연이 정말 우연하게 집 앞에 투어를 왔다니! 스튜던트 립카드를 만들고 난 이후에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수요일 공연으로 티켓을 발권했다. 마티네 공연에 학생이라 기존 가격보다 10유로 정도 더 싸게 예매할 수 있었다. 자리도 이번에는 1층 사이드 맨앞(그때에는 단차가 높았었다)이 아닌 2층 정중앙 맨앞으로 예약해서 전체적으로 크게 공연을 보려고 했다.


2014년 런던에서 보았던 연극 War Horse
2014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서 본 조이(Joy) 푸펫과 조종사 모형

대망의 공연날. 평소보다는 좀 더(?) 신경써서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낮공연이여서 그런지 확실히 어린 아이들과 어르신들, 단체 관람을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극장 구경에 로비 구경에 사람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가 바로 공연 시작! 공연을 이미 영상으로도 실제로도 몇 번 봤었기 때문에 이전보다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훨씬 수월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1층 구석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엔 지체장애인 관객이 공연 중간중간 추임새(?)나 본인의 생각들을 여과 없이 큰 소리로 내뱉는 것 같았는데, 이 소리들이 전혀 작지 않았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중간에 살짝 간극이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이 소리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확실히 공연에 지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내가 놀랐던 것은 이런 상황이 3시간 내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 누구 하나도 전혀 내색이나 불편한 티를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일을 했었던 사람으로써 관객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컴플레인을 걸거나 극장 측에서도 난처한 상황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배우들과 관객들, 극장 관계자들이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배려해서 공연을 보는 내내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 역시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써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고맙게 느껴졌다.  


(위쪽부터) Bord Gais Energy Theatre 전경 / 포토월 / 티켓




성급한 생각들


새벽 4시. 악몽을 꾸고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악몽을 꿨던 적이 열 손가락 안에 꼽는데 무슨 일일까 싶었다. 꿈에서의 나는 한 회사에 지원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결과가 나지 않아 연락을 해 보니, 내가 이미 합격을 했었지만 회사에서 나와 연락이 계속 닿지 않아 최종적으로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에 깜짝 놀라 당황해서 울고 불고 사정하고 뭐 그랬다.

 

돌이켜보면 아일랜드에 오기 전까지 나는 여러 곳에서 프로젝트 형식으로 일을 해 오면서 비교적 짧은 템포들로 업무를 처리하고 해결해야 했다.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비슷한 일들을 해 오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잦은 업무 환경의 변화와 계속된 이동으로 인해 어느샌가 내 몸 구석구석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함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이쪽 일이 정녕 나에게 맞는 일일까, 좋아서 하는 것과 잘해서 하는 건 다를 텐데, 10년 뒤에 내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등 온갖 생각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생각들을 끝맺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우연하게 검색했던 아일랜드로 1년 뒤 오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내 상태이다. 그래, 어떻게 보면 나는 내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일수도 있겠다.

그렇게 나는 '일'에 대한 생각을 최대한 하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도 큰데. 이렇게 악몽을 꿨다는 것은 마음 한 구석에 '일'에 대한 불안감이 분명 어느정도 있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그리 많지 않기도 하고(3~4개월 정도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정도), 아일랜드는 일자리는 없고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포화 상태라 이 곳에서 파트타임을 구하기도 참 쉽지 않은 환경이거니와, 기본 30장 정도되는 이력서를 들고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나를 어필해야 겨우 한 두곳에서 연락이 올까말까 하다는 후기들을 보니 걱정이 안 될 수도 없었다. 채용 절차도 한 번에 붙는 것이 아니라 이력서를 통과하면 얼굴을 맞대고 보는 면접을 보고 그 이후에 트라이얼이라고 하는 실무면접까지 단계가 꽤나 까다로웠다. 떠나오기 전 워킹홀리데이 책자에서는 정말 만에하나의 경우 일을 구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어도 너무 좌절하지 말라는 얘기도 곁들여져 있었는데, 이 말이 순간 뇌리에 스치는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도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일했던 업무환경과는 분명 다를 것이고 기존과는 다른 처우에서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막상 선뜻 내 스스로 첫 발을 내딛디가 어려운 것도 있었다. 이번의 악몽은 이러한 생각들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잘 될꺼야, 아잣!


집 앞 바에서 첫 혼술. 기네스 파인트.




그 외 여담들


1. 약한 장염으로 고생한 다음날, 집에만 있으면 더 늘어질 것 같아 6월부터 새로 살 집을 미리 구경하고 왔다. 이곳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틸오르간(Stillorgan)'이라는 지역의 기숙사형 레지던시로 아침/저녁 제공에 싱글룸과 싱글화장실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직접 방문해 보니 동네도 안전한 것 같고 더블린에서 교외로 빠지다 보니 시골(?)스러운 느낌도 드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근처에 일식 레스토랑이 있는데, 평일 런치로 파는 도시락이 정말! 맛있었다. 앞으로 이사하고 난 뒤에 자주 가지 않을까 싶다.


(위쪽부터) 다음 숙소 미리 엿보기 / 정말 맛있었던 일식 레스토랑 도시락(벤또)


2. 일요일 낮 브런치가 너무 먹고 싶어 동네 근처를 죄다 검색해 봤는데, 40분 이상 줄을 서야 하거나 이미 문을 닫았거나 해서 '아 오늘은 글렀다' 싶어 공원에 멍하니 앉아 있다 급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가 있었던 것이 퍼뜩 떠올라 그곳으로 출발했다. A Table이라는 이름의 카페인데, 도착하니 다행히도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바로 브런치 주문! 이스턴 홀리데이 연휴 한정 'Easter Bun'을 시키고 아메리카노도 하나 시켰다. 웬걸, 너무 맛있잖아. 심지어 같이 주는 우유도 너무 고소했다. 언니들도 스타일리쉬하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룰루랄라해졌었던 기억.  


(위쪽부터) 카페 A Table 전경 / 이스턴 홀리데이 한정메뉴였던 Eastern 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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