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 롤랑 바르트
아침 햇살을 두 눈에 담아온 걸까, 그는 밤새 한 숨도 못 잔 사람마냥,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유별난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전과 달리,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더듬거리며 말도 절었다. 귀는 달아올라 있었고, 손바닥을 연신 허벅지에 비벼 닦았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나요.”
“...”
꿀이라도 몰래 한 술 떠먹은 냥, 그는 입만 달싹이다가 말을 삼켰다. 미희는 괜히 걱정이 들어, 남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담겨진 감정의 흐름을 찬찬히 살폈다. 그가 마른 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자, 미희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주었다.
“눈 떠보세요.”
미희의 말에도 태수는 쉽사리 눈을 뜨지 못했다. 미희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그의 땀을 식혀주었다. 얼굴에 시원한 숨결이 닿자, 태수는 작게 눈을 떴다. 미희는 그런 남편을 보고 귀여움을 느껴, 활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태수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갛게 익었다.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미희는 잡고있던 두 뺨을 얌전히 놓아주었다.
쑥쓰러운 듯 머리를 털어내는 그를 보고 있자니, 두 눈을 가릴 듯, 말 듯 길게 자란 앞머리에 시선이 갔다. 지금의 덥수룩한 머리 모양새도 분위기 있고 좋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슬퍼보이기도 했다. 우수에 잠겨 있다고 해야 할까, 모성을 자극하는 애처로움도 나쁘지 않았지만, 미희는 불필요한 감정을 덜어내기 위해 그에게 새로운 머리 모양을 권했다. 밝고 건강한 모습의 남편을 만나고 싶었다.
“분위기가 달라질 것 같은데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보는 건 어떨까요? 사진촬영 모델이 되어 주시니, 이발비는 제가 낼게요.”
태수는 자신의 긴 앞머리를 매만졌다. 갑작스런 권유에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는 읍에 위치한 이발소에 가서, 기꺼이 머리를 맡겼다. 미희는 커다란 풍경화 그림 아래에만 앉아있지 않고, 이발사 옆에 서서, 원하는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이발사는 태수에게 묻기보단 그녀의 말에 따라 가위질을 했고, 이내 세련된 느낌의 머리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목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났고,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하지만 몇 가닥 정도는 앞으로 내려 멋을 낸 모양새. 미희는 남편의 잘생긴 얼굴이 전부 드러나 인상이 훨씬 환해진 모습에 손뼉을 쳤다. 태수는 여전히 토마토 같은 얼굴을 하고 시선을 떨궜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연신 부끄러워 하는데도, 그는 충분히 멋졌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자전거를 한 대 빌릴 테니까, 타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이른 아침의 공원, 미희의 말에 태수는 금세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전생의 남편은 자전거 타기를 워낙 좋아해, 과일 배달만 아니었으면 오토바이보다는 자전거를 항시 고집했을 사람이었다. 먹고 살기가 바쁘고, 무거운 과일상자들을 안전하고, 빠르게 배달 해야해서, 면허도 등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취득했었다. 오토바이 타기를 권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도와주길 바랐고, 돈 욕심이 났던 것이 사실. 전생의 억척스런 자신이 떠올라 그녀는 쓴 울음을 삼켰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삶, 미희는 오토바이 헬멧 대신, 자전거 헬멧을 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전처럼 빠르게 달릴 필요 없어요,
한적한 공원에서 꽃 바람을 맞으며
유유자적, 천천히 나아가도 좋아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전거 헬멧을 쓴 태수는 해맑게 웃었다.
“당신은 자전거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군요.”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함께 타고 싶어서 배워두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네, 어릴 때부터 아버지랑 같이 자전거를 타고 싶었던 바람이 있었습니다. 친구 녀석이 부모님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저는 자전거도, 아버지도 없어서 많이 부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태수의 말에 미희는 울컥했다. 그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첫째 아들 지우가 아파서, 이루지 못했던 바람. 병원살이를 하는 지우에게 미안해 둘째하고도 자전거를 못 탔던 모양이었다. 생각말미 미희는, 자전거 안장에 올라 탄 태수의 허리를 감쌌다. 태수는 갑작스런 포옹에도 당황하지 않고, 미희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나랑 같이 자전거 같이 탈래요?”
“나는 타는 법을 모르는데...”
“뒷좌석에 앉아요, 태워 줄 테니까.”
미희는 삼각대에 고정시킨 카메라를 주행 방향에 맞춰 멀리 세워두고서,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남편의 허리를 꽉 잡았다. 설정해 둔 촬영 시간에 맞춰, 두 사람은 공원길을 달렸다. 그가 페달을 힘차게 밟을수록,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에는 허공에 흩날리던 꽃들이 감겨들었다. 미희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기도 했고, 크게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전생, 한번도 남편과 나란히 자전거를 탔던 적이 없었다. 아. 아픈 지우가 아니라, 내가 함께 자전거를 탔더라면. 그랬다면 그이가 조금 행복했을까. 미희는 옷소매로 젖어든 눈을 얼른 닦았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서 어떤 사진을 찍을 건가요?”
자신의 훌쩍거림을 기쁨으로 오해한 듯, 태수는 신이 난 말투였다. 미희는 그의 고조된 기분을 유지 시키려 다음 장소로 곧바로 향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걷는 내내 눈을 마주쳤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바르게 비추는 햇살이 영혼 곳곳에 우울한 물기를 거뒀다.
촬영지는 미리 알아 둔, 오래된 서점이었다. 책방은 묵은 먼지 냄새가 그득하고, 표지가 빛바랜 책들이 유리창 아래로 잔뜩 놓여있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얼마든지 사진을 찍으라며, 흔쾌히 촬영 허락을 해 주셨다.
미희는 책을 고르는 그리고 책장을 파닥이며, 문장을 훑는 태수를 앵글에 차례로 담았다. 초반 그는 약간 작위적인 표정으로 책등을 매만지다가, 무언가 마음에 드는 제목을 발견한 듯, 책을 한 권 꺼내 읽었다. 앞선 어색한 자세와 달리, 이끌림에 의한 포즈들이 몹시 자연스럽다고, 미희는 생각했다. 독서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몇 장 찍었을까, 미희는 다른 폼을 취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태수는 책에 시선이 못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책인가요?”
미희의 물음에 태수는 정신이 돌아온 듯, 미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란 책입니다.”
“어떤 구절이 인상깊길래 그렇게 열심히 읽은 건가요?”
낯선 외국인이 표지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태수는 손가락으로 특정 구절을 짚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태수는 책장을 덮긴 했지만 좀 더 읽고 싶다는 듯, 표지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기다리는 행위가 사랑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한 권 사드릴까요?”
“선물인가요?”
“기념으로.”
“어떤 기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발비도 내줬는데 고마워서 어쩌죠.”
“나중에 내가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면, 그 때 제 책을 한 권 사주세요.”
미희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사랑스러움에 그는 수줍게 웃었다. 꼭 약속하겠다고, 잊지 않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희는 책을 계산한 뒤, 책의 앞 장에 오늘의 날짜와 함께 짧은 문구를 적었다. 좋은 덕담을 쓰려다가, 진실된 생각을 적는 편이 낫다고 여겨, 오롯이 품어온 감정을 간략하게 적었다.
나는 당신을 보면 마음 한 편이 아파요.
감사한 두 번째 삶,
우리 맞이할 다른 계절을 꿈꾸며
맺힌 아픔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랍니다. 미희.
미희로부터 책을 받아든 태수는 아파요,라는 문맥을 손가락으로 재차 매만졌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점 할아버지께서 덤으로 책갈피를 한 개 주시기에, 미희가 그를 대신해서 받았다. 책방에서 걸어나와, 다시 공원으로 향할 때까지 태수는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입을 뗀 태수는 차분히 가라앉은 말투로 되물었다.
“두 번째 삶이라는 표현은 무슨 뜻인가요?”
“그건...”
미희는 약간 곤란해하다가 얼버무렸다.
“바닷가에서...”
“그래요. 그렇군요.”
미희는 예쁜 책갈피를 살피며 물음표를 건냈다. 단순히 분위기를 바꿔볼 생각이었다.
“삶에 책갈피를 꽂는다면 어디에 꽂고 싶나요?”
질문을 받은 태수는 책을 품에 안고서, 미희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미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희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태수는 미희가 당황하긴 했어도 싫어하지 않자,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뒤, 다시 한 번 이마에 입을 맞췄다. 봄을 닮은, 상냥하며 다정한 입맞춤. 몸을 떨어뜨린 태수는 옅게 미소지었다.
“지금. 당신과 함께하는 바로 이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