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안개꽃 꽃다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날, 기차를 타기에 앞서 미희는 남편과 바다를 다시 찾았다. 바다는 파도로 일어섰다, 주저앉길 반복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자신의 영역 안에서의 쇄신을 꾀했다. 미희는 하얀 포말을 바라보며, 운명이란 정해진 범주 안에서, 보다 나은 변화를 꿈꾸는 자신과 마주했다. 과연 어디까지 허락될 지 알 수 없어도, 감히 새 삶을 일궈볼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바다를 마주하고, 수평선을 응시하는데 반해, 태수는 묵묵히 바닷가를 걸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이제는 분명한 삶의 의욕을 찾을 수 있었다. 등 뒤에 새로 날개가 돋은 사람처럼 그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 사뿐히 걸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미희는 여생 남편의 삶을 움켜 쥐고싶은 욕심이 났다. 넘칠듯, 도로 물러서는 바다의 행보에 미희는 생각을 다듬었다. 파도에 쓸려나간 모난 바람들이 점차 둥글어졌다.
우리 함께 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결코 탐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욕심으로 그를 망치지 않도록.
미희의 생각이 물을 머금은 모래처럼 단단히 쌓아올려졌다. 한참을 앞서 걷던 태수가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미희의 쓰린 속을 가늠하지 못하는 듯, 아니 상상조차 못하는 듯, 그는 여전히 힘껏 사랑받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비로소 삶의 정착지를 찾은 사람처럼, 서둘러 닻을 내리는 듯한. 인생의 반려를 찾았다는 듯, 기쁨을 지우지 못하는 그를 보며, 미희는 말을 삼켰다.
전생의 아내인 자신을 알아보고,
기꺼이 영혼의 옆 자릴 내어주는.
고맙고도 예쁜 사람.
미희는 그의 생각이 투명하게 읽혀, 오히려 손 끝이 스치는 것도 조심했다. 손등이 맞닿을 때면, 마음 내키는대로 덥썩 손을 잡기보단 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을 매만지는 정도로 마음을 정돈했다. 이 정도의 간격으로, 그가 만족할 수 있도록. 행여 마음의 갈증이 생기지 않도록.
들뜬 태수는 미희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는 코 끝을 부벼왔고, 미희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는 애정을 표현하는 남편을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나서서 호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옅게 미소지었을 뿐. 태수는 미희의 이마에 다시금 입을 맞춰주었다. 그녀는 수줍게 이마를 매만졌다.
기차역에서 두 사람은, 상경에 필요한 표를 나란히 예매했다. 태수는 역무원에게 꼭 옆자리로 배정한 티켓을 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욕심을 접은 미희는 이제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미희는 자신의 손을 꼭 맞잡는 태수를 보고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닌 심적 거리도 우려될 만큼 가까웠다.
그래, 서울에 갈 때 까지만.
서울에 도착한 뒤부터는
한 걸음 떨어져서.
사이좋게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탑승한 내내 아이들처럼 키득거렸다. 미희는 그의 어깨에 고갤 기대앉았고, 태수는 이야길 하는 내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승무원이 지나갈 때에는,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사서, 달걀을 한 알씩 나눠 먹었다. 미희가 한모금 마신 사이다에, 그는 주저없이 입을 가져다댔다. 미희는 언행에 스스럼 없는 태수를 보고 웃음이 났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태수는 대답대신 크게 웃었다. 기차의 승객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렸다. 그는 쏟아지는 시선 따위 개의치 않아보였다. 한바탕 큰 웃음 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미희를 끌어안았으니까. 미희는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이대로 으스러지는 것이 아닐까. 태수는 그녀의 뺨에 연신 뽀뽀를 해준 뒤에나 꽉 잠갔던 팔을 풀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차와 동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미희는 손을 놓았다. 짐을 풀어서 내리려는데, 태수가 미희의 짐을 대신 들었다. 미희는 무거우니 그럴 필요없다고 했지만, 태수는 고집을 부렸다. 그는 그렇게 미희의 짐을 집 앞까지 옮겨다주었다. 집 앞에서 쉬이 떠나지 못하는 남편. 그의 목소리가 애달팠다.
“편지해도 됩니까?”
미희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의 물먹은 눈빛을 보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주일마다 한 통의 편지가 매주 배달되었다. 편지에는 그의 한 주 근황부터,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온기가 피어오를 듯, 애틋한 사랑고백이 담겨있었다. 오늘따라 볕이 유독 뜨거워서, 그 날의 시린 바다가 떠올랐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가을 비로 인해 별을 보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 첫 눈이 내릴 때 우연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수줍게 적혀있었다. 일상에 지쳐 답장을 깜빡하고 보내지 않아도, 그는 매주 한 통의 편지를 보내주었다.
날이 추워지고, 졸업을 앞두자 미희는 마음이 바빠졌다. 편지만 읽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졸업작품 전시회에 출품할 사진을 골라야 했던 것이다. 대학을 다니며 많은 사진을 찍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분명했다. 몇 개월 전, 출사 당시, 남편을 찍은 사진 몇 장에 미희는 자꾸만 손이 머물렀다. 태수라는 피사체 자체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유독 애정을 담아서 촬영했던 탓이다. 그녀는 추려낸 몇 작품 중 고민을 거듭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미희는, 졸업작품 전시회 출품작으로 능소화를 귀에 꽂고 예쁘게 웃는 남편의 사진을 골랐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바다로 뛰어드는 사진은 공모전에 따로 출품했다. 컬러 사진인 ‘능소화’와 달리, 바다로 뛰어드는 사진은 명암 짙은 흑백사진이었다. 때문에 묵직한 슬픔과 비장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까, 졸업작품 전시회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능소화 사진은, 사랑스럽고 몽환적이었다. 꿈 속에서 언뜻 보았던 모습 같기도 했고, 동화의 삽화같은 분위기도 있었다. 미희는 채도를 보정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다.
작업을 마친 그녀는, 오랜만에 태수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졸업작품 전시회 날, 미희의 사진은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 A0 사이즈의 큼지막한 액자로, 안 그래도 크기만으로도 눈에 띄는데, 돌담길에 핀 주황빛 능소화 속, 태수가 부끄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머리 위로는 연보라 색 밤하늘이 펼쳐져 있고, 찬란한 은하수 아래서 별처럼 빛나는 눈을 반짝이는 청년. 귀에 꽂은 능소화로, 누가 꽃이고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을 듯한.
미희는 사진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사진학과 외 타 학과의 학우를 비롯, 전시회를 찾은 일반인들이 그녀가 작가인지 모르고, 사진에대해 이런저런 평을 늘어놓았다. 미희는 칭찬 일색인 듣기좋은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사진의 주인을 잠자코 기다렸다. 하루 일정을 포기하고 와 줄지 모르겠지만.
어깨에 얹혀지는 손, 그 적당한 온기와 귓가에 닿는 달콤함으로, 미희는 태수가 도착했음을 알아차렸다. 태수는 미희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리고, 그녀가 바라보던 작품에 시선을 옮겼다.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의 자신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작품 앞에 막 도착한 청년이, 사진 속의 모델임을 알아보았는지, 사람들의 소근거림이 좀 더 요란해졌다. 태수는 액자 앞에서 입을 벌렸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나요.”
태수는 사진을 찬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반가움에 미희는 작게 숨을 삼켰다. 태수는 한동안 작품에 빠져있다가, 정신이 들었다는 듯, 손에 들린 꽃다발을 미희에게 내밀었다. 흰 안개꽃만 수북한, 안개꽃 꽃다발이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은 미희는 문득 전생의 그가 떠올랐다. 지갑이 얇아서 꽃집에서 가장 싸다는 안개꽃을 골라 매번 선물하던 그이. 돈이 없어도 내게 꽃다발은 사주고 싶고, 하지만 붉은 장미를 살 돈은 없고… 그러다보니, 미희는 전생 매번 안개꽃 꽃다발을 선물 받았다. 미희는 그 날의 감각이 떠올라, 옅게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안개꽃을 가장 좋아해요.”
미희의 말에 태수는 얼굴을 붉혔다. 전시회장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은 눈쌓인 교정을 걸었다. 그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태수는 미희를 부축하며 걸었다. 가슴이 후련해질만큼, 시린 겨울 공기가 영혼을 가득 채웠다. 머리까지 맑아지는 느낌에 미희는 크게 숨을 쉬었다. 손에 들린 안개꽃 꽃다발이 꼭 눈송이처럼도 보였다. 안개꽃을 쓰다듬던 미희는 나란히 선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음 고생이라도 했던 걸까, 그러고보니 태수는 살이 조금 빠져있었다. 미희는 걱정을 담아 뺨을 어루만졌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가요, 전보다 말랐군요.”
“당신을 그리워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말 끝은 깨끗한 눈처럼 투명하게 녹았다. 태수는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