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연 Oct 29. 2024

책갈피는 하얀 봄에, 12.

12. 덕애원

만남없이 편지만 주고받던 동안, 그의 농밀한 감정은 색이 한층 짙어진 듯 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겨울바람에 미미하게 떨리는 속눈썹, 오른쪽 눈 아래의 점, 작은 코, 그렇게 붉은 입술까지, 태수는 애틋한 눈길로 미희를 집요하게 탐했다. 마음 속 많은 말이 아롱다롱 맺힌, 하여 한 마디 말도 쉬이 할 수 없는 애타는 침묵. 입술을 마주댄 것이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녹아, 영혼의 혀 끝을 기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적은 캠퍼스 한 켠, 겨울 벤치 앉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숨결을 나눴다. 미희 역시, 태수를 밀어내기 보다는, 입을 벌려 밀려드는 애틋함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태수는 미희의 허리를 감싸쥔 채, 몸을 떨어뜨릴 줄을 몰랐다. 자신의 입 안, 그렇게 영혼을 휘젓는 그의 진실함에 미희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지나가시던 교수님의 헛기침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황급히 몸을 떼어낸 미희는 뒤늦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뺨을 감췄다.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넌지시 바람을 건낸 태수는 엷게 웃었다.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 목소리는 여러 결로 갈라졌다. 그 거칠고도 낮은 음이, 잊었던 전생의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미희는 남편과의 숱한 밤이 떠올라, 숨만 삼켰다. 미약하게 몸이 떨리고 있음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녀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태수는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지만, 미희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새초롬 예쁜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한없이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자신의 품 안에 깊이 가둬서, 기쁨을 졸라대고 싶었다. 미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졸업 전시회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한 통의 편지를 보내는 대신 그가 집을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던 게. 한껏 멋을 부린 그는 긴장한 얼굴로, 안개꽃 꽃다발을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장미 한 송이 없는 꽃다발이었지만, 그 안개꽃 만으로도 소담하니 꽃다발은 사랑스러웠다. 


그와 함께 하는 주말은 유독 시간이 빨랐다. 두 사람은, 다방에서 각자 좋아하는 팝송을 쪽지에 적어 신청하기도 했고, 그렇게 선곡된 곡을 작게 따라 부르며 서로의 귓가에 마음을 속삭여주었다. 서촌 오래된 서점도 찾아갔었다. 새 책을 선물하려 했는데, 그는 아직도 롤랑 바르트의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재차 다시 읽는지 더딘 속도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고 했다. 롤러장에서 손을 맞잡고 롤러도 타고,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었다. 연인끼리 나란히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면서, 태수는 자신을 업고 돌담길을 전부 걸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이별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같아서, 미희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등에 눈물자국이 난 줄도 모르고 그는 아이처럼 웃었다.


겨울 내내 그의 품에 살았다. 날선 칼 바람은 한번 더 안을 구실이 되어주었고, 흰 눈은 선물받은 안개꽃을 떠오르게 했다. 세상은 온통, 그이를 닮아 마음을 곱게 적시거나, 그렇지 않아 그리움의 정체가 되거나 둘로 양분되었다. 그렇게 봄날은 마음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머리카락에 분홍 벚꽃잎이 내려앉던 날. 태수는 조심스런 말투로, 동행을 권했다.


“당신과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태수의 말에 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술관, 영화관 등 한 계절동안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라니, 어딜까. 몇번의 질문에도 그는 자신을 에스코트 하는 내내 말을 아꼈다. 여러 그루의 벚나무에 감싸인 작은 건물, 그 앞에서 태수의 걸음이 멎었다. 푸른 기와 지붕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동복지시설, 덕애원이었다. 간판을 본 순간, 미희는 무릎이 꺾여서 잠시 그에게 몸을 기댔다. 


덕애원은, 남편이 자란 고아원이었다. 전생, 프로포즈를 받기 전에 그에게 소개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미희는 심장을 다독이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현생의 흐름이 전생과 같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감이 맞다면 며칠 뒤 그에게 프로포즈를 받을 것이다. 미희의 심란함을 읽지 못했는지 태수는 어릴 적 그늘을 이어 소개했다. 그의 펼쳐진 손 너머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이 보였다.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어여쁜 영혼들이 연신 웃음소릴 냈다. 그리고 그 밝음 한 가운데에 인자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당신께 소개하고, 부모님과 다름없는 원장님께 같이 인사오고 싶었습니다.”


태수는 미희를 중년 여인에게 데려갔다. 원장님이라는 중년 여성은, 태수를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태수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미희는 그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생, 명절이면 잊지않고 연락을 드리던.


“덕애원의 원장 이서연입니다. 태수가 이 곳에 여자를 데려온 건 처음이라 놀랍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미희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머릴 숙였다. 원장님은 남편의 어머니와 다름 없는 분이셨다. 어려서부터 곤궁한 처지의 남편을, 이토록 건강하고 훌륭한 성인으로 키워주신 점, 성인이 되어 자립할 때까지 마음써주신 점에 대해 항상 감사드렸던 그녀였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미희를 보고 원장님과 태수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그에 관한 말을 나서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나, 원장님의 안내로 두 사람은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햇빛이 구석구석 녹아있는지, 건물 내부는 습한 기운이 전혀 없었다. 아늑한 공기를 따라, 원장실이란 표시가 되어있는 문 앞에 세 사람은 멈춰섰다.


“들어오세요. 맛있는 음료를 나눠줄테니.”


원장님의 말씀에,  두 사람은 달콤한 냄새를 따라 들어갔다. 원장님은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씩 만들어주셨다. 작은 마시멜로우도 몇 개 떠 있었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함께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태수도 결혼할 나이가 되었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다니, 정말 기쁜 일이야.”


태수의 확신에 찬 말과 달리, 미희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원장님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장님은 말을 잠시 멈추시곤 사진앨범을 꺼내와 태수의 어릴 적 모습을 보여주셨다. 사진 속 귀여운 꼬마가 미희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미희는 아이를, 어린 시절의 태수를 좋은 감정만 갖고, 껴안아 줄 수 없어,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희의 반응에 태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고, 원장님은 쓴웃음을 지으셨다.


“죄송해요.”


미희는 사과의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원장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당황한 듯 태수가 서둘러 원장실에서 뛰어나왔다. 태수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나가는 미희를 붙잡았다. 어깨를 붙잡힌 미희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미안해요. 태수씨. 정말 미안한데, 나… 나, 있잖아.”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태수는 그녀의 부드럽게 껴안고서, 재차 중얼거렸다. 괜찮으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자신을 안심 시키려는 그 말에 더 미안하고 속이 상해서, 태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미희는 울먹였다. 울음을 삼키려 애쓰는 미희를 알아차리고, 태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출신을 알게 되어서, 이제 내가 싫어졌나요?”


덕애원에 자랐다는 이유로 그가 싫어지다니, 그럴 리 없었다. 배경 따위, 지갑 사정 따위 신경쓰는 여자였더라면 전생에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거야. 마음의 상처를 숨기려 애써 웃는 태수를 보고, 미희는 고개를 떨궜다. 결국 눈물 방울이 그의 낡은 신발 위로 떨어졌다. 태수는 괜찮은 척 숨을 골랐지만, 쉽지 않은 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참으려 애를 써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복도에서 부둥켜 안고 우는 두 사람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원장님은 문 밖 울음 소리를 전부 들으시고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마음 밑바닥에 고인 서러움이, 넘치는 미안함이 전부 쏟아질 때까지.


“태수는 마음에 상처도 많고, 외로움 역시 깊은 아이였어요. 때때로 소리내어 웃곤 했지만, 언제라도 삶을 놓아버릴 것처럼 항상 위태로운 눈빛을 하고서.”


미희의 부운 눈에 얹을 물 수건을 만들러 태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앉아있는 그녀에게 원장님이 말을 건냈다. 목소리에는 언짢음이나 노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타까움, 그리고 속상함이 묻어났을 뿐.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두 사람 모두 웃는 얼굴로, 기쁨 가득한 눈빛으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열려진 창문으로 벚꽃잎 여러 장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타고 날아들어왔다. 미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밖, 어린 시절의 태수가 보였다.

이전 11화 책갈피는 하얀 봄에, 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