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는 하얀 봄에, 16.

16. 너는 어디에.

by 신지연

미희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현생, 어떻게 다시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하는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만….”


미희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옅은 색으로 젖어있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끝이 눈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거에요.”


태수는 쉬쉬, 소리를 내며 미희를 달랬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양 볼에 차례로 입을 맞추는 등, 부드럽게 그녀를 얼렀다. 미희는 그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릴 뿐. 애처로운 그 모습에,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떨쳐낸 것은 미희였다.


“태수씨. 나는 이번 생, 당신이 나처럼 공부를 마음껏 하길 바라고, 족쇄같은 가정을 이유로 날개가 꺾이지 않길 바라. 내 품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고픈 것은 모두 하며 살아가도록 해요.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없이 당신을 지지하고 응원할테니까.”

“미희야. 내가 바라는 것은….”


태수는 괴롭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바라는 건 너와의 결혼이야. 내가 유일하게 꿈꾸는 것은 우리가 진실로 하나되어, 서로의 가족이 되는거야.”


미희를 품에 가둔 채 앉아있던 태수는,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프다던 첫째 아이를 만나고 싶어. 부족함 느끼지 않도록 사랑을 듬뿍 주고 싶어.”


태수는 확신에 차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끝이 후미진 상가의 과일가게라고 했나. 그래, 그게 뭐 어때서. 남에게 빌어먹고 살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태수씨.”


“나와 한번 더 같은 삶을 살지 않겠어?”


태수의 목소리는 이제 간청하는 듯 어조가 달라져있었다.


“나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겠어?”


절망감에 빠진 미희는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기 시작했다. 태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연신 다정하게 토닥였다. 한참을 울던 미희는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울음이 묻어났다.


“미안해. 나는 당신을 같은 모습으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요.”


울음섞인 진심어린 말에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미희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나서, 배웅을 할 때까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골몰하는 듯, 그는 말을 아꼈다. 대문을 닫으려는 찰나였을 것이다. 태수는 닫히려는 문 사이에 갑작스레 손을 넣었다. 놀란 미희는 행동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결심한 듯 태수는 어렵게 입을 뗐다.


“우리가 결혼을 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미희가 머뭇거리자, 태수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태수씨. 당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먼저 생각하도록 해요.”

“나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우리 아이들과 평생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에요.”

“안녕까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확실한 행복은 우리가 함께...”


태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주먹을 꼭 쥐었다. 미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태수는 끓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 숨을 크게 삼켰다. 그리고 미희의 양 어깨를 감싸쥐었다.


“정말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거요? 내가 죽는 때와 상황을 바꾸고 싶어서?”


태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우리의 아이들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외, 일생 누려야 할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하길 바라기에.”


미희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더 이상 미희에게 마음을 전해봤자, 같은 말이 반복 될 뿐이란 것을 깨달은 태수는 몸에 힘이 풀린 듯 잡은 어깨를 놓았다. 그의 눈 속 맺혀있던 빛망울이 한꺼번에 꺼진 것처럼, 두 눈은 마냥 검기만 했다. 물 먹은 솜처럼 두 팔을 바닥으로 떨군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죽은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었지?”


미희의 대답에 태수는 미희의 뺨을 감싸쥐고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미희는 새카맣게 일렁이는 태수의 눈을 올곧게 응시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언제부터 였는지 모르겠으나, 두 뺨이 번들거릴 정도로, 마치 어둠에 심장을 빼앗긴 것처럼, 삶의 빛을 송두리채 잃어버린 사람처럼 처연하게 울고 있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가는 먹먹한 감정이 쏟아질까봐 그는 입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남편의 낯선 표정에 미희는 몸이 떨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한참 미희의 눈을 바라보던 태수는 투박하고도 뜨겁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미희 역시 가슴에 돌이 들어앉은 듯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내비쳤다. 숨이 멎어도 상관없다는 듯 태수는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아랫입술이 부은 듯 아프고, 거세게 끌어안은 팔의 힘으로 숨이 막힐 정도의 갑갑함이 느껴졌지만 미희는 있는 그대로 남편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한참을 흐느끼며 입을 맞추던 태수는, 입술에서 피 맛이 날 즈음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미희는 부어서 찢어진 자신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따갑고 아픈 그 느낌이 꼭 자신의 사랑의 형태인 것만 같아, 그녀는 견딜 수 없이 속상했다. 태수는 미희의 피 맺힌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애틋한 감정이 차올라 흘러 넘치고 있었다.


“잘 지내시오.”


태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새벽의 거리로 사라졌다. 놀란 미희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흔적도 없이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린 남편. 인사의 의미를 깨닫는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미희는 대문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각선의 접점같은 찰나의 추억만 남기고 그가 떠나갔다. 명치 부분, 옷자락을 세게 움켜잡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린 미희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그 뒤로 보름을 앓아누웠다. 고열에 시달리고 온 몸이 아팠지만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더 이상, 태수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다.

찾을 수 있는 방도도 없었다.


미희는 한 계절 내내 침대에서 생활했다.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고,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백방으로 그를 찾아 보았지만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닮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삼시세끼 미음을 먹으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미희는, 그와의 추억이 어린 데이트 장소부터 시작해서, 처음 만났던 장소까지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렇게 사랑의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태수는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미희네 골목 다세대 주택가는 대부분 헐려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그렇게 둘만의 추억도 많이 옅어졌다. 미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절이 되면 덕애원에 가보았다. 아이들에게 나눠줄 간식을 박스로 가져가서 원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태수의 소식을 묻곤 했다. 하지만 원장님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보여주실 뿐 마땅한 답을 주지 않으셨다.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다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줄 알았다면.


미희는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 가는데에도, 그 날의 아픈 입맞춤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둘 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도 눈을 돌렸다. 부모님께는 출사를 간다는 핑계로, 미희는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높은 산과 너른 들판, 투명한 호수와 검은 바다는 물론 남쪽의 이름모를 섬들도 찾아가 보았다. 몇 천만이 넘는다는 한국인들 중 그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미희는 그의 고독이 새삼 강렬히 느껴져 숨을 바로 쉬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 날의 고백. 자신이 바라는 것은, 꿈꾸는 유일한 것은 오직 나와 진실되게 하나가 되는 것. 그렇게 가족이 되는 것이라던 그 말의 무게를 비로소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올해 명절도 와 주셨군요.”


덕애원의 원장님은 고개를 숙이며 미희를 반겼다. 미희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간식이 담긴 박스를 한 쪽으로 옮겨놓고서, 꾸벅 인사를 했다. 원장님은 손수건을 꺼내 미희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올해는 평소보다 양이 더 많군요.”


원장님은 의아해 하시며 미희의 얼굴을 살폈다. 미희는 숨을 고르고서 대답했다.


“앞으로 몇 년간 덕애원에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미희는 곤란한 표정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서연 원장님을 따라 덕애원 원장실로 향한 그녀는 따뜻한 코코아잔을 받아들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원장님은 재촉하지 않으시고 미희가 입을 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셨다. 미희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뒤 겨우 속내를 털어놓았다.


“한동안 외국에 나가려고 합니다.”

“사진 작가로서 활동 때문인가 보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미희의 눈, 그 속에 맺힌 빛이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태수씨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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