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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연 Nov 19. 2024

책갈피는 하얀 봄에, 15.

15. 고백.

갑작스런 프로포즈에, 당혹감을 느꼈던지 입이 벌어진 미희를 앞에 두고, 태수는 엷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잠자코 답을 기다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결국은. 미희는 두 손을 말아쥐곤 숨을 삼켰다. 정해진 결말을 피하려 아둥바둥댔지만, 결국 전생과 같이 결혼 해 달란 고백을 받고 말았다. 미희는 몸을 떨었다. 이대로 승락하면 그는 또 과일가게에서 배달을 하다가….


미희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얼어있는 반응에 태수는 다시금 조심스레 운을 뗐다.


“미희야, 나와 결혼해줄래?”

“미안하지만….”


미희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단호함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줄곧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어?”

“태수씨, 정말 미안하지만….”


“삶 속 나란히 걷고 싶다고도 했었잖아.”


태수는 의아하다는 듯이 재차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분노나 당혹스러움이 섞여있다기보다는, 그저 그녀의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감정이 묻어났다. 태수는 미희의 손을 매만지며, 얼굴을 살폈다. 눈길은 부드러웠고, 또한 다정했다. 거절에대한 이유가 있다면 거짓없이 말해달라는 듯, 그렇게 생각을 바꿔달라는 듯, 그는 따스하게 말을 이어갔다.


“애매해 헷갈리게 하지말고,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나에대한 감정을….”

“태수씨를 많이 사랑하는데, 사랑, 사랑하지만….”


미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미희의 모습에서, 태수는 얕은 실망을 느꼈다. 태수는 몇 번 더 미희의 손을 매만지다가, 이내 손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바르게 섰다. 그는 아까와 달리 조금 엄한 목소리로, 꾸중하듯 되물었다.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이 즐겁소?”


뜻 밖의 말에 미희는 숨을 들이켰다. 눈 앞에는 별이 번쩍했다.


“왜 그렇게 못된 말을 하는 거에요.”

“나야말로 묻고싶어. 이성을 대함에 있어 언행이 왜 그리 애매합니까. 도통 당신의 뜻을 모르겠어.”


태수는 미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고,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눈을 맞췄다. 당혹감으로 붉게 물든 미희의 얼굴을, 태수는 공들여 천천히 살폈다. 그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미희의 마음을 쫓아왔다.


“나를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고는 싶은데 결혼은 원치 않는다는 겁니까.”

“…그래요.”

“어째서?”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미희를 두고, 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미희야, 어째서?”


그녀가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자, 태수는 잡고 있던 미희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숨이 묻어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태수의 눈빛이 차가워짐을 느낀 미희는,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태수의 눈을 응시했다. 두 번째 삶에대한 비밀을 더 이상 숨길 이유 또한 없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편이 저 차가운 눈빛, 식어가는 감정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분명 나을 것이다. 미희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정말 내가 솔직하길 바라나요?”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도 언제나 항상.”


미희는 태수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진실을 입에 담았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결혼을 했었어요. 태수씨.”


태수의 동공이 한껏 커졌음에도, 미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결혼을 해서 수십년을 함께 살았었어요. 첫째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파서 병원생활을 줄곧 해왔었고, 둘째 아이는...”

“잠깐.”


태수는 미희의 말을 잘라내고, 입을 벌렸다. 미희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태수씨, 나를 믿어주겠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미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쓴내나는 미소에도 그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담담한 그녀의 태도에 태수는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미희는 그를 안심시키듯 손등을 마음결처럼 쓰다듬으며, 마저 말했다.


“티끌같은 작은 신뢰라도 좋으니, 믿음을 갖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태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미희가 일어선 의자에 대신 주저앉았다. 미희는 태수의 앞에 바싹 다가가 섰다.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대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미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여지껏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나는 60대 여성의 삶을 살다가, 남편인 태수씨의 장례식장에서 기적적으로 20대의 삶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때부터 줄곧 전생의 선택지와 다른 결정들을 해왔어요. 단 한 가지, 태수 씨. 당신만 제외하고….”


미희의 목소리가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날, 당신은 하고싶은 공부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더욱 애 써준다고 약속해주었어요. 사고 소식을 듣고 난 후에야, 내가 밉살맞게 무슨 말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어요. 꿈과 가능성을 가로막았던 나와의 결혼생활은, 당신에게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거에요. 돌이켜보면 우리는 웃었던 기억만큼 울었던 시간 역시 많았어요. 첫 아이가 아파서 여러모로 힘이 들었기도 했고, 날이 갈수록 당신이 태우는 담배 개피가 많아졌었어요. 우리는 삶에 지쳐 싸우는 날도 점점 많아졌고, 그래서….”


태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미희의 얼굴만 응시했다. 미희는 숨을 삼켰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이번 삶에서는 당신을 놓아주려 합니다. 움켜쥐려 욕심내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그저 삶의 한 켠을 지키는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려 해요. 그렇게 태수씨를 지키려 해요. 지금의 감정이 전생의 삶보다 깊이가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자유로운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마음을 내려놓는 거에요. 보다 나은 일상을 위해서. 보다 기쁜 일생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미희를 바라보며 그렇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 만났던 날 기차 안에서, 당신에게 다친 머리가 괜찮냐고, 지금은 아프지 않냐고 울며 물었던 것. 가끔씩 나도 모르게 당신을 여보라고 불렀던 것. 바다에서 숨을 끊으려던 당신을 막으려다가 급박하게 지우 아빠라고 불렀던 모든 것은 사실 그래서 였어요.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도 언제나 항상.”


미희는 고개를 떨궜다. 눈물방울이 전시회장의 바닥에 떨어졌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당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던 이 시간 속에서.”


태수는 가녀리게 몸을 의탁해오는 미희를 품에 안았다. 태수의 허벅지 위에 앉아,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미희는 연신 흐느꼈다. 어깨가 어찌나 가냘프게 들썩이는지, 태수는 미희의 등을 재차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가 정말 부부였소?”


태수의 물음에 미희는 얼굴을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미희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쥔 태수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마음을 포갰다. 맞닿은 입술에서 눈물로 인한 짠맛이 났지만, 그의 달콤함이 입 안을 휘저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랜 입맞춤을 끝으로 입가에 미소가 걸린 태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우리 아이는 몇 명 쯤 되었소?”


태수는 미희의 눈가를 닦아주며 재차 물었다. 미희가 대답하려는데, 태수는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듯 먼저 입을 뗐다.


“아이들의 이름은 뭐였지?”


미희는 대답하지 않고, 태수의 허벅지에 앉은 채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품을 파고들듯 안겨오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던지, 태수는 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행복하지 않을 리 없어.”


태수는 미희를 껴안고서, 작게 속삭였다.


“너와의 하루가 기쁘지 않을리 없어.”


전시회장 창 밖으로 짙은 어둠이 내려, 별들이 예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늦어 거리의 인적도 드물었다. 상주 직원은 눈치껏 퇴근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고, 둘 만 남은 공간에서, 태수는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상에 우리 단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아. 미희는 자신의 세상을 꽉 채우는 그의 심장소리에, 애틋해 감미로운 목소리에 감겨있었다. 마음이 편해졌고, 몸을 굳게 하던 긴장 역시 녹아 사라졌다. 태수는 미희를 더욱 힘주어 안고, 말을 이었다.


“전생, 나의 죽음이 어떤 형태였든, 나는 네가 있어서 겨우 살아있었을거야. 지금처럼.”


그는 미희의 이마와 두 눈, 코와 입술에 차례로 입술을 가져다댔다. 두 번째 삶을 살면서도 자신을 한결같이 아껴주는 아내가, 참기 어려울 만큼 사랑스러워서. 가엾고도 고마워서.


“현생, 어떻게 다시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하는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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