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런 나를 정말 사랑합니까."
삶을 바라지 않던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미소짓는 그녀는 여생의 이유도, 일상의 동력도 되어주었기에 감히 태양을 입 안에 삼키려는 사람처럼, 분에 넘치는 욕심을 품었다. 그래, 나는 그저 장미꽃 한 송이를 더 주고 싶었던 마음 뿐이었다. 그조차도 분에 넘치는 바람이었겠지만, 빌어먹게도….
태수는 눈물로 번들거리는 미희의 얼굴을 알아채고,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굳어있었다, 감출 수 없는 가난을 세상 전부에게 들킨 것처럼. 미희는 바닥을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높은 굽의 구두가 부러져서, 그녀는 연신 비틀댔다. 무릎에서는 피가 흘렀고, 단정하던 옷차림은 형편없이 구겨져있었다. 단촐한 삶이 부끄러워, 처지에 어울리는 장소로 되돌아가려했는데, 그녀가 자신을 뒷따라 나올 줄은, 넘어지는 것도 두려워 않고 허둥대며 달려나올 줄은. 미희는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을 조심히 주워 품에 안았다. 그녀는 간청하듯 시선을 떨궜다. 가냘픈 목소리는 눈가처럼 옅게 젖어있었다.
“부탁이에요, 가난 따위를 이유로 내게서 달아나지 말아주세요.”
태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난 따위가 아니야. 겨우 가난, 고작 가난으로 쉽게 말하지마.”
언성을 높이는데도, 미희는 겁을 내긴 커녕, 절뚝이며 자신에게 걸어왔다. 태수는 그녀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삶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처럼.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평온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멈춤없는 미희의 걸음에, 태수는 으름장을 놓듯 재차 일갈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긴 커녕 찬물조차 졸졸 나오는 단칸방에서, 웅크리고 물을 받아 겨우 씻는 삶인거야!”
“괜찮아요. 두렵지 않아요. 한파에 얼어서 물 한 방울 제대로 나오지 않는 수도여도….”
미희의 답에 태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지지않고 쏘아붙였다.
“손 벌릴 가족조차 없어서, 독 안의 쌀이 떨어지면 헛배가 부를 때까지 맹물이나 들이키는 삶인거야.”
“괜찮아요. 무섭지 않아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 천막을 치고 산다쳐도, 주린 배를 채우려, 입 안에 모래를 우겨넣어야 한다쳐도….”
태수의 눈에 물결이 일어, 마음 밑바닥에서 뒤섞인 감정이 울컥 흘러내렸다.
“장미꽃 한 송이 더 살라치면, 차비도 없어 밤새 걸어서 돌아가야 하는 삶인거야.”
울음을 참는 그를 보며, 손에 들린 장미꽃 향이 너무 서글퍼서, 미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낡은 운동화로 시선이 흘러갔다. 헤질만큼 헤져서, 금방이라도 밑창이 떨어질 것만 같은. 저 신발로 밤새 걸어갈 생각을 했구나. 안개꽃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도 바보처럼. 미희는 꽃다발을 꾹 움켜쥐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삼킨 뒤 태수와 눈을 올곧게 마주했다.
“태수씨. 당신 결핍이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나는 나란히 걷고 싶어요.”
그는 주먹을 꾹 말아쥐고서 이어 말했다. 손에 들린 것은 분명 원망이나 실망이 아닌 서글픔 그리고….
“도망쳤잖아. 덕애원에서.”
태수의 말에 미희는 입을 벌렸다. 그는 여지껏 자신이 달아났다고 믿고 있었다. 스스로 미천한 출신이라고 여기는 듯, 태생의 부정함으로 인해 거절당했다고 알고 있었다. 미희는 고개를 저었다.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마음이 명치에 걸려, 답답했지만. 그의 오해 앞에서 마음이 타들어가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부터 저었다.
“당신이 덕애원 출신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무엇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거야.”
태수는 뒤로 물러서는 것을 멈추고, 뜻을 분명히 물어왔다. 미희는 긴 숨을 토해냈다. 가눌 수 없는 어지러움이 마음을 마구 휘저었다. 미희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서,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태수는 찰나에 가까운 미희의 머뭇거림마저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그랬다. 그와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그의 마지막이 서럽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미희는 추레한 상가에 남편의 가능성을 묶어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아내로 맞이해, 아픈 첫째 아들의 치료와 대학원 공부 중 하나를 택하지 않길 바랐다. 이미 전생에서, 한 겨울 동파된 수도를 부여잡고 울었던 적이 있었고, 독안의 쌀이 바닥나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쌀을 꾸러 다녔던 적이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런 것은 두렵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이미 해 본 것이기에 더더욱. 그간 씻지 못하는 불편, 배를 곪는 불안 뿐이었을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의 언어로, 가난을 풀어낸 태수에게 미희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미희는 태수만큼 울음을 삼켰다.
“어째서 버림받은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나요. 내가 여지껏 당신의 품에서만 살았던 것은 다 뭐라 생각하고….”
미희의 말에 태수는 젖은 숨을 토해냈다. 그는 흐르는 감정을 훔쳐내지도 못하고, 겨우 물었다.
“이런 나를 정말 사랑합니까.”
태수가 주먹을 펴고, 빈 손을 내보였다. 그의 어깨는 아래로 맥없이 떨궈져서, 사랑에 연민의 색을 덧칠했다. 미희는 심장 부근이 참 많이 아프다,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태수는 미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둠에 자신을 가두는 쪽을 택했다. 미희는 그의 뺨을 어루고서, 말없이 입을 맞췄다. 감은 두 눈에 한 번. 젖은 두 뺨에 한 번. 그리고 말라서 버석거리는 입술에 또 한 번.
애틋한 감정이 두 사람의 입 안에서 구르며, 영혼에 달게 스며들었다. 그의 입술에 마음을 맞대던 미희는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몸을 뒤로 제쳤는데, 태수는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물러선 만큼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입술을 탐하는 그의 간절함에, 미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태수가 너무나 애처로워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물이 입술에 젖어들어 그 날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태수씨.”
미희의 말에, 그는 젖은 눈으로 웃었다. 간신히 본 미소에 미희는 태수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심장과 심장이 맞닿아 같은 속도로 뛰고, 그렇게 멈췄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갤러리 앞 행인들과 바스라지는 별빛이 제각각 거리에 목소리를 더했다. 미희와 태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챈 것이다. 미희의 얼굴이 달아오르자, 태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갤러리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미희는 한번 밀어내지도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마음을 전부 맡겼다. 태수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또한 품 안의 온기가 다정해서 싫지 않았던 탓이다.
태수의 품에 안겨 갤러리로 돌아온 미희는, 카운터 뒤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전시회장 상주 직원이 상비약을 가져와, 피가 나는 무릎에 임시로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그녀가 소독약을 바르는 동안, 태수는 굽이 부러진 하이힐 한 쪽을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발목을 삐거나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태수의 긴 숨을 오해한 미희가 얼른 말을 꺼냈다.
“구두를 새로 살 필요없어요, 망가진 신발은 고치면 돼요.”
그녀는 태수로부터 신발을 건내받아 말을 이었다.
“구둣방에 가서 고쳐달라고 하면 되니까, 걱정할 것은 없어요.”
“구두가 아니라 당신 걱정을 했어.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의자에 앉아있는 미희의 앞에, 태수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미희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의 미희,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 빛나는 외면보다 내면이 더욱, 태양같이 찬란한. 태수는 직원에게서 건내받은 반창고를 미희의 무릎에 직접 붙여주었다. 그는 반창고 위로 지혈하듯 꾹꾹 상처를 매만졌다. 미희가 눈을 찡긋 거리자, 태수는 반창고에서 손을 뗐다.
“다치게 해서 미안해.”
“사과 하지 말아요, 내가 넘어진 걸요.”
미희의 웃음에도 그는 따라 웃지 못했다.
“가난 따위를 이유로, 네게서 도망쳐서 미안해.”
“돌아와줬으니까 괜찮아요.”
미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덕애원에서 내가 달아났다고 생각하지도 말고요.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미희야.”
태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숨에서 떨리는 마음결을 알아챈 미희는 눈을 둥글게 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미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바르게 두었다. 태수는 미희의 손을 오랫동안 매만지다가, 부드럽게 말을 건냈다. 목소리에는 여린 수줍음이 묻어있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