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시

by 신지연

흰 손바닥 얼기설기 어린 뿌리는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로부터.


선대의 긍지는 소명이 되고 망울진 꿈이 된다.

빌딩 숲에

푸른 도포 자락을 켜켜이.


동공과 창공의 이 빛을 잃지 않는다면

부르튼 맨 발과 젖은 두 뺨, 곱은 흰 손

모두 다 괜찮아.


으슬한 아침은 사실 풍요의 바닷길.

지知가 지智가 되어, 끝내 지地가 될 수 있도록

반만년 지은 쌀로, 기름기 도는 밥술을 네게 떠 먹일 수 있도록

간밤 폭풍, 젖어 쓰러진 네게 숨을 불어 넣어줄 수 있도록

순백의 폐 가득 꿈을 들이킨다.


구르미에 앉아, 높이

높이

높이 웃는 붉은 댕기.





[ 시 노트 ]


문창과 대학생 시절. 떠올랐던 소설의 소재들을 켜켜이 눌러담아 장독대라 이름붙인 USB에 가득 넣어뒀다. 작가의 정신이 발효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종의 타임 캡슐이었다. 이야기는 당시에도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손맛인 필력과 영혼의 성숙이 더해지길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작가가 인간으로서 깊이가 생긴다면 빚어낸 이야기가 더욱 맛있어 질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흔을 일 년 앞둔 이제, 뚜껑을 열어 한 국자씩 장을 길어 올리려 한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마음을 맑게 하려 항상 애써왔기에, 어떤 맛의 장을 꺼내든 그릇 위에 오른 요리는 하나 버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업로드한 이 시는 학부생 시절, 시 창작 기초 강의를 들으며 과제로 제출했던 습작시다.


작성한 시노트를 보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 4월 초 종친회에서, 30년 만에 족보를 다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연智然이 지연知然으로 잘못 기재되었어요. 검열하시는 분이 실수하셨던 모양입니다. 이미 배포되었기에 돌이킬 수 없었지요. 속상한 마음에 울기도 하였지만, 지혜는커녕, 일단 지식부터 쌓으라는 조상님들의 말씀으로 여기려고요. 명석함을 넘어 현명함을 갖출 수 있도록, 그래서 만물을 품은 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독자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제 도움으로 모두가 웃는 얼굴이 된다면, 저 역시 살아 구르미에서도, 죽어 구름 위에서도 환히 웃을 수 있을거예요. ]


물론 지금도 초짜 티를 벗지 못했지만, 20대 중반의 나는 웃음이 나올만큼 비린내나는 어설픈 문인. 하지만 가슴에 품은 배포만큼은 온통 파랗게 느껴질만큼 당찬 녀석이었던 것 같다. 조급함과 답답함에 연신 심장을 두드리던 시절. 젊음의 멍 자국이 보여서,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시를 재차 읽고, 또 읽는데 20대 당시 느꼈던 불안과 슬픔 그리고 고독이 너무나 또렷하게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오랜시간 잊고 지냈던 낭떠러지로 나는 단박에 굴러 떨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흔들리며 여기까지 올라왔던 것일까. 햇빛 아래 웃을 수 있는 지금은, 어린 날의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하게 까지 느껴진다. 빛을 향해 꾸준히 걸어줘서 진정 고맙다. 녀석의 땀과 눈물을 머금고 지금의 작은 꽃이 핀 거겠지.


본격적으로 글을 쓴 지 올해로 15년. 과거 머물렀던 절망의 낭떠러지는 현재의 나를 위협하며 삼키는 어둠이 아닌 나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하는 지형도라 생각한다. 나는 뿌리의 끝을 세심히 살피며, 더 높이, 높이 뻗어나갈 것이다.


"검은 흙을 거세게 움켜 쥔 뿌리를 자랑스러워 하며, 크게 뛰어오르자."


< 푸르름, 나의 이름 > 작사 : 신지연, 작곡 : SUNO (AI), 편곡 : 신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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