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는 하얀 봄에, 05.

05. "아가씨 날 알아요?"

by 신지연

미옥이가 페이크 목폴라를 입으며 긴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두발자유화에 교복자율화까지 시행되면서, 여동생들은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펑크 스타일이라는 괴상한 머리를 한 남학생의 호위를 받으며, 미선이는 제일 먼저 등굣길에 올랐다. 미은이는 핀컬 파마를 한 머리카락을 요리조리 살펴본 뒤 청바지를 꺼내입었다. 브랜드 운동화를 신은 미옥이의 손 인사를 마지막으로 집은 고요함에 잠겼다.


미희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쳤다. 노트가 온통 까맣게 변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학에 가겠다는 장담에 꾸중도, 격려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저 방으로 들어가셨다. 사이에 앉은 어머니만 안달복달하며 눈치를 보셨다. 아버지의 응원없이도 미희는 복잡한 문제들을 계속해서 풀어나갔다.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족의 지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더해진다면 훌륭한 동력이 되겠지만. 채점 후 정답이 늘어갈수록 미희의 눈은 밝게 빛났다. 삶의 형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미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양한 문제들을 쉼없이 오고가던 펜이 멈춰 선 것은, 창 밖, 새하얀 눈이 내린 날. 대학 입시 합격 소식을 들은 이후였다. 미옥이와 어머니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고, 미선이와 미은이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분위기를 돋궜다. 미희는 그제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는 열 오른 두 뺨을 감싸쥐었다. 스스로 해낼 줄 알았지만, 그랬지만. 그래도 정말 이뤄낼 줄이야! 다가구 주택, 반지하에 사시는 이웃 아주머니의 축하의 말까지 모두 듣고나서야 미희는 허리에 힘을 빼고 편히 앉았다. 대학입시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10개월 가량의 시간을 모조리 책 속에 쏟아부었던 탓에 묵은 피로가 몰려왔다.


두어번의 노크가 방의 분위기를 바꿨다. 3초 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셨다. 등 뒤로 숨긴 손에는 무언가 커다란 것이 들려있었다. 미옥이는 아버지의 등장으로 달라진 방의 흐름을 빠르게 읽어내고, 두 동생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미선이와 미은이까지 모두 나간 후에 침대에 걸터앉으셨다.


“듣자하니 대학에 합격했다고.”


미희는 긴장감에 주먹을 꼭 쥐었다. 학비를 지원해주실 수 없다던가, 하여 합격 사실 자체를 없던 일로 하라던가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미루던 선을 보게 하실 수도 있겠지. 미희는 아버지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다급한 목소리에는 굳은 결의가 담겨있었다.


“훌륭한 점수로 합격했어요. 서울 안에서도 좋은 대학이라고 소문이 난 명문대...”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지.”


“반대하셔도 소용없어요. 저는 제 삶을 진취적으로 꾸려나갈...”


꿈을 지켜내려, 그렇게 바르게 살아내려 미희가 진땀을 흘리자, 아버지는 미희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다. 톡톡, 두어번 머리를 쓰다듬으신 아버지는 등 뒤에 감춰뒀던 것을 조심히 꺼내놓으셨다. 서툴게 포장이 된 네모난 상자. 미희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떨리는 손 끝으로 상자를 매만지던 미희가, 불안을 드러냈다.


“이게 뭐예요, 아버지?”


아버지의 눈짓에 미희는 떨리는 손 끝으로 상자의 포장을 벗겨냈다. 상자에는 비싸기로 소문난 외제 카메라가 담겨있었다. 렌즈도 크기 종류별로 여럿 들어있었고, 사진촬영과 카메라 유지보수를 위한 다양한 악세사리가 함께 있었다. 미희는 눈 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뽀얗게 번지는 시야에 미희는 젖은 볼을 훔쳤다. 땀과 눈물이 섞여 번들거리는 얼굴로, 미희는 입만 달싹였다.


“아버지...”


축축히 젖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희를 보고 아버지는 빙긋 웃으셨다. 숨김없는 웃음이 추석날, 밤 하늘의 보름달만 같아 미희는 곧 마음이 풍요롭고 편안해졌다.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


아버지는 튿어진 포장지를 정리하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네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구나. 앞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기 바란다.”


미희는 상자를 곁에 미뤄두고,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미희의 등을 아버지는 연신 토닥이셨다. 너무 기뻐 감사하다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아 미희는 말을 마구 더듬거렸다. 뜻 모를 어물거림에도 아버지는 그래, 그래, 자랑스러운 내 딸. 기특하고 장하다,라 재차 말씀하셨고, 들썩이는 마음을 평온으로 이끄셨다.


일주일 가량 설명서를 정독한 미희는, 처음으로 찍는 사진으로, 가족 사진을 골랐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양복을 갖춰입으셨고, 어머니도 보색 뚜렷한 화장을 하고 소파에 앉으셨다. 미옥이는 가장 아끼는 치마를 꺼내 입었고, 미선이도 어깨를 펴고 바르게 섰다. 미은이도 몇 번 씩 얼굴을 박박 닦아 세수했다고 했다. 타이머를 맞춰두고서, 미희는 아버지 곁으로 달려갔다.


새로운 삶을 축하하듯 연달아 셔터음이 들렸다. 경직된 모습의 첫 사진과 달리,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은 자연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서로를 마주보기도 했고, 껴안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뺨에 입을 맞추셨다. 미희는 생각했다. 다시 살아갈 수 있어서, 두 번째 삶이 허락되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신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직 자신은 잘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고, 아무 이유가 없다고 해도, 자신이 끌러낸 선물보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의미가 있었다. 반짝이는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목련이 핀 교정은 뽀얗게 피어나는 마음이 힘껏 내달리기 좋았다. 인자하신 교수님들의 가르침은 존경심 마저 들었다. 미희는 아버지께서 사주신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앵글 안에 청춘을 담았다. 학교의 풍경이 푸르게 물들어감에 따라, 미희의 사진들도 조예가 깊어졌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들며, 존재의 이유와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품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캠퍼스에는 미희라는 이름대신 카메라 요정이라는 별명이 더 자주 불렸다. 미희는 날이 갈수록 사랑하는 것이 하나 둘, 늘어갔다.


목요일 오전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벼르던 출사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위험하게, 여자 혼자서 무슨 여행을 간다는거야.”

“바다나 산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는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위험하게 여자 혼자 무슨 산과 바다를!”


밥상을 차리시던 어머니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극구 반대하셨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수저질을 하던 여동생들은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콜록콜록했다. 아버지께서는 낡은 수첩을 꺼내와 오래 된 친구의 연락처라며, 여행지의 숙소를 정해주셨다. 아침, 점심, 저녁 즉 하루 3번씩 집으로 전화를 할 것, 그리고 낯선 사람을 조심할 것 등등 몇 가지 당부의 말씀도 덧붙이셨다.


“여보, 정말 미희를 밖으로 내돌릴 건가요?”

“내돌리다니, 딸 아이에게 그게 무슨 말이오.”


“혼자서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가게 내버려 둘 거냔 말이에요.”

“사진 작가가 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했던 각오였소.”


아버지는 넉넉히 돈을 쥐어주시고, 밥을 굶지 말라고 하셨다. 여행 중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시기도... 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믿음을 배신하고 위험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미희는 항상 주의를 경계하리라 다짐했고, 호신용으로 쓸 작은 칼과 몇 안되는 짐을 꾸렸다. 어머니는 머리에 찬 수건을 대고 누워버리셨지만, 미희는 마음을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다잡았다.


기차의 차창으로 온갖 생각들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삶의 주마등과 같은 그 모습에 미희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입학하고 채 몇발자국 걷지 않은 듯 한데, 벌써 졸업을 앞두고 있는 자신. 인생의 속도는 왜 이다지도 빠른 걸까. 이러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다시 60대가 되지 않을까.


맥없이 흐른 시간에 감성을 더하려, 미희는 카세트라디오를 꺼내서 귀에 꼽으려다가 멈칫했다.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미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낯선 남성이, 낯익은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미희는 너무 놀라 큰소릴 내고 말았다.


“당신...!”


남편이었다. 젊고 앳된 얼굴의 그는, 당신이라고 호명되자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남편은 천천히 미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차의 흔들림과 함께 걸어오는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미희는 엉거주춤 서서 남편의 몸을 지탱하려 손을 뻗었다.


“아가씨, 날 알아요?”


남편의 말에 미희는 입만 뻐끔거렸다. 남편은 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신태수이올시다. 멀리서 아가씨를 바라보는데 예뻐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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