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 적힌 재희의 생일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던 생일이었다, 20221003

by 윤재영

아침부터 분주히 씻느라 침대 위에 내려둔 핸드폰에 커피 쿠폰 선물이 쏟아졌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흔한 카페에서 쓸 수 있는, 적당한 가격대의 쿠폰이 다섯 개정도 쌓일 때 즈음 재희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알고 지내는 친한 사람이 몇 명 안 될 정도로 좁은 인간관계에 갇혀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한두 번 자기소개서 첨삭을 해 주어서 지금까지 연락을 드문드문 이어오고 있는 아는 동생 한 명, 아주 가끔씩 술을 마시고 서로 생존 신고만 하는 이전 직장 동기 두 명, 이번에 이직해서 인수인계로 바쁜 선배 한 명, 그리고,


- 오늘은 화방 안 오세요?

- 평일이라서 바쁘신가

- 저번에 밥 사주겠다고 하신 거 안 그러셔도 돼요

- 그냥 제가 드린 쿠폰으로 같이 커피 마셔주세요


메신저 창 위에 '이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락처는 얼결에 교환했는데, 서로의 이름은 고작 메신저의 채팅명으로 알게 되었다. 그게 조금 우스웠다.


흔하게 쓸 수 있는 무료 이모티콘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말투는 언뜻 보면 무뚝뚝한 듯해 보였지만, 재희는 멍하게 그걸 내려다보다가 조금 웃어 보였다. 사람이 거의 오지 않고, 입시 직전 철에나 가끔 붐비는 화방은 혼자서 지키기 재미없다며 자리에 늘어지던 이서가 떠올랐다. 무언가를 그리다가 내팽개친 크로키 북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이서의 말투는 메신저에 쓰인 말투와 정말로 똑같았다.


알기 쉬운 듯 어려운 학생이었다. 재희는 자판을 두드려 간단하게 답장을 남겼다.


- 오늘 일찍 퇴근하면

- 이따 연락할게요


그렇게 답장만 남긴 후 이후에 차례차례 쌓이는 메시지는 읽지 못했다. 우선 출근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아무리 회사에서 생일자에게 상품권과 함께 조기퇴근을 선물로 수여한다고 해도, 그 단축된 근무시간 내에 급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재희는 서너 칸쯤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가끔 자신을 못 미더운 눈으로 쳐다보는 곽 차장을 떠올리다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동기들이 전부 좋은 마음으로든, 표면적으로든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넬 때 '생일 가지고 유난이다' 따위의 말을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늘따라 출근길은 조금 붐볐다. 단 한 번도 회사에 불편한 블라우스를 입고 간 적이 없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런 마음이 들어 입은 옷에 주름이 갈 것 같았다. 몸에 꼭 맞는 옷이 어딘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져, 재희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 속 쌓여있는 메신저 알림들 맨 위로 현재 재생되고 있는 노래의 플레이 버튼이 반짝이고 있었다.


*


이래서 생일을 딱히 반기게 되지는 않는다니까. 재희는 조금씩 눈치를 보며 식판에 남은 국물을 떠먹었다.


아침부터 똑같았다. 출근하자마자 업무 메신저에 뜬 소식을 확인했는지 온갖 비꼼으로 둘러싼 생일 축하를 받자니 속이 쓰렸다. 전날 입사 동기들과 술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키는 일은 전부 다 기한 내에 끝내고, 관할이 아닌 일도 어느 정도 찾아보고 만든 보고서도 갖다 내기를 여러 번인데 홀로 무언가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상품권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생일인데 한 턱 쏴야 하는 것 아냐,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로 말하는 곽 차장에게 선수 치듯 그 옆에 앉은 과장이 눈치 없는 척 생일자가 얻어먹는 것 아니냐고 떠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눈치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팀 사람들의 점심 식사를 사게 된 곽 차장이 점심시간 다 되어서 돌린 것은 구내식당 식권이었다. 육천팔백 원짜리 생일선물이었다.


그래도 차장님 성격에 저 정도면 많이 참은 거죠, 하고 동기들이 대화를 끝냈다. 꿉꿉한 식당을 나와 카페로 가서 커피를 사 마시는 와중에도 딱히 어떤 특별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분명 출근하기 전에는 조금 색다른 마음을 가져볼까 싶어 구석에 걸려있던 옷을 꺼내 입고 나왔는데, 평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어제 술을 마시며 과하게 축하를 받아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재희가 빨대 끝을 질겅질겅 씹다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지금은 일이 바쁜 철도 아니고, 급한 일은 그제 오전 중에 끝내서 어제 수정 보완까지 마쳤으니 앞으로 사흘 정도는 비상 수준의 일이 주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금요일에 일찍 퇴근하고 놀러 갈 것이 뻔하니 아니꼬워 저러는 게 분명하다, 고 우스갯소리 하듯 수다를 떨며 사무실로 올라오니 재희는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마침 차장이 전화를 받으며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터라, 재희는 미적미적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오늘은 어쩌면, 아주 어쩌면 용기를 내어서 마음속에 있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이름을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재희는 차장이 정신없는 틈을 타 인사하자 누가 나가는지도 모른 채 손을 흔드는 것까지 보고 망설임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이제 아무도 붙잡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아직 밝은 대낮의 거리를 걷다가 재희는 문득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서에게는…… 연락하지 않고 가도 괜찮을 것이다. 깜짝 놀라게 연락 없이 가도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오셨어요, 하고 인사할 것이다. 그 얼굴을 떠올리며 재희는 공연히 조금 웃었다.


회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화방에 도착하기 전 동네로 간다. 재희에게 제법 큰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가기 싫은 마음, 가고 싶은 마음 전부 섞여서 걸어가기만 했던 그 동네에,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내달려 도착한다는 것은 재희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이런 날이니까. 가끔은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어쩌면…… 동네에 도착해서 마음을 훌훌 털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


버스는 재희를 동네 중간에 내려두고 휙 떠나버렸다. 재희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래서야 걸어서 도착하나, 차를 타고 도착하나 다른 점이 없지 않나 싶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었다.


여러 추억이 뒤섞인 동네는 그만큼 트라우마 될 거리가 많았다는 뜻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 재희는 조금 불편하도록 허리가 딱 맞는 바지를 입고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이대로 앞서 나가도, 돌아가도 재희에게는 잘못된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면, 그냥 그대로 나아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게 더 괜찮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재희가 공연히 멈추어 있던 바람에, 날이 좋았던 바람에. 스산하게 식으려면 아직인 따뜻한 공기가 재희의 뺨을 스쳤다. 고소하고 달콤한 꽃 향기가 났다. 재희는 문득 향기의 시작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작은 창 너머 사람의 두 인영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부 다 끝났어. 나는 기대할 만한 것도 없었지, 참. 배차 간격이 넓지 않은 모양인지 버스는 금방 재희의 앞에 멈추어 섰다. 재희는 환승입니다, 하고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데나 자리 잡고 앉았다. 어째 타고 보니 집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화방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라.


어찌 되었든 생일에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재희는 앞 좌석 등받이에 가려진 채 상체를 숙이고 몸을 조금 동그랗게 말았다. 멈추어 있던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재희는 멈추어있고, 자신이 아닌 것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슬펐다.


- 오고 계세요?

- 못 오셔도 괜찮아요

- 떼써서 죄송해요


손에 쥔 핸드폰에 진동이 웅웅 울렸다. 재희는 못 가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핸드폰을 완전히 꺼버렸다. 역시 바란 적 없는 생일이었다.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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