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재희에게, 20221004

by 윤재영

하나로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카락마저 성의 없어 보이지 않고, 그 나름대로 꾸민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영주를 본 재희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고등학교 건물은 항상 서늘했고 선생들은 학생들의 교복 위 외투가 보이는 족족 빼앗아갔다. 입을 것이라면 교복만 입든, 자켓을 입은 뒤 그 위에 외투를 입든 하라는 방침이었다. 선생들의 눈치를 보며 요령 있게 구는 학생들도 있기야 했지만 그런 줄 모르는 학생들은 편리함을 추구하다 외투를 빼앗겨 교복 한 벌만 입고 교실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재희도 보통 그러한 학생 중 한 명이었고, 영주는 불편함을 따뜻함으로 승화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팔 들기가 힘들다, 옷이 너무 두꺼워져서 몸이 둔해진다 등등 학생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돌아오는 것은 학생답게 굴기나 하라는 잔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처사였지만 그때에는 전부 다 그랬다. 재희도 학교가 파한 뒤 외투를 받으러 갔다가 꿀밤과 함께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영주는 그런 학생들 속 꿋꿋하게 교복 자켓까지 갖추어 입은 위에 외투를 입고 다녔다. 쟤는 진짜 신기한 애다, 하고 재희는 영주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다른 학교에 비해서 머리 규정이 자유로우니까 옷을 엄청 빡세게 잡는다더라, 그런 말이 들려온 것도 같았던 4월. 다들 외투를 하나둘 벗고 더러는 춘추복을 입고 다니는 시기였다. 재희는 그즈음되어 한 해동안 쭉 함께 앉을 짝으로 영주를 뽑았다. 알고 선택한 것은 아니었고, 흔히 교탁에 뿌려놓은 종이쪽지를 하나씩 들고 가 그것으로 자리가 정해지는 식이었다. 재희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자리에 도착했을 때 영주는 책이나 공책 같은 것들을 책상 서랍 안에 정리해 넣고 있었다.


안녕.

응, 안녕.


두 사람은 그전까지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던 어색한 사이였으므로 첫인사는 그게 다였다. 재희나 영주나 함께 밥을 먹는 친구들이 있기야 했지만 두 사람 모두 혼자 다니는 게 익숙했으므로, 첫 눈 맞춤은 그렇게 지나갔다. 재희는 공부에 집중하는 영주를 가끔 힐끔힐끔 바라보고 공연히 칠판에 적힌 의미 없는 필기를 공책에 받아 적었다. 재희는 면학실에서 야간 자습 시간을 보내는 영주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


함께 앉은 짝과 해내야 하는 수행평가가 주어진 화사한 봄날이었다. 식곤증 탓인지 나른하게 풀린 몸은 자꾸만 잠이 쏟아졌지만, 옆에 앉아서 집중한 얼굴로 종이를 들여다보는 영주의 얼굴을 보면 딴청을 피우려야 피울 수가 없었다. 재희는 잠 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대신 턱을 괴고 영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항상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눈가에는 그 흔한 다크서클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부하는 걸 보면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것 같은데.


왜?


영주의 입이 그렇게 움직였다. 뒤늦게 확인한 영주는 어느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집중해야지.


영주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재희는 영주가 볼펜으로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공책 한 장을 부욱 찢어 종이 옆에 두고는 필담하듯 적어내려 갔다.


- 있잖아

- 응

- 너 동복 위에 잠바 입고 다녔잖아

- 응

- 안 불편했어?


문득 그런 게 물어보고 싶었다. 재희는 그런 고요한 적막을 이겨낼 용기도 없었거니와 공부하는 영주를 조금은 방해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조금 뜬금없는 물음에 영주는 눈을 깜빡이고 재희를 한 번, 종이를 한 번 바라보다가 단정한 글씨를 재희의 물음 아래에 써 내려가는 것으로 답했다.


- 전혀?

- 아 진짜?

- 동복 마이 소매 자르고 패딩 입어서 안 불편했어


뜻밖의 대답에 재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도 되는 건가? 아니, 이게 정말인 걸까? 그러나 마주한 영주의 눈은 태연하기 짝이 없어서, 재희는 조금 흔들리는 눈으로 영주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이런저런 필담이 나누어진 종이를 반듯하게 반으로 두 번 접어 자신의 필통 안에 집어넣었다.


거기 낙서하는 두 명 가지고 나와.


재희가 고개를 슬쩍 들었지만 재희와 영주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희가 다시 영주를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영주는 재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재희는 그런 영주를 바라보며 머릿속과 마음속으로 멋대로 정의 내린 영주를 이리저리 판단하다가 결국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이상한 애. 웃음이 예쁜 애. 그 정도의 영주. 재희에게 존재하는 영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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