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에게, 20221005
잘 맞지 않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옷차림 하며 체육복 바지를 입고 뛰어다니는 모양새가 도드라졌다. 체육시간이 끝난 뒤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영주는 조금 풀린 머리카락을 다시 고쳐 묶으며 대각선 너머의 재희를 바라보았다. 달리기가 빠른 재희는 다들 움직이기 싫어하는 체육시간에 날아다니듯 활약했다. 체육시간에 짝을 하거나 같은 팀이 되면 이기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었으니, 재희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런 재희가 혼자 다니는 것,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영주는 체육복을 갈아입고 느릿느릿 자리에 앉으며 옆으로 다가오는 재희를 바라보았다. 땀이 났는지 이마에 조금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나 상기된 뺨 같은 게 조금 귀여웠다. 신나게 뛰어놀고 숨을 헐떡이는 강아지, 혹은 어린아이 같았다.
이따가 밥 먹고 매점 갈래?
매점은 왜?
아까 체육에서 달리기 일 등했다고 매점 쿠폰 받았어.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 같이 아이스크림 들고 운동장 산책 하자는 말에 영주는 힐끔 공책을 바라보았다. 배운 공식, 배울 공식 몇 개를 미리 정리해 두어야 하지만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매몰차게 뿌리치기 어려웠다. 오늘은 여름 치고 딱히 더운 것도 아닌데, 그 얼굴에 떠오른 활기찬 웃음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목 뒤가 화끈거리고 뜨거워졌다. 책상 한 귀퉁이에 계획을 적어 붙여놓은 자그마한 포스트잇을 공연히 손바닥으로 가리고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희는 씩 웃어 보였다. 달렸는데도, 땀이 났는데도 마냥 좋아 보이고 어울려 보이는 사람은 처음인 것 같다고 영주는 생각했다.
*
영주는 얼굴로 꽂혀오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재희와 눈이 마주치니 놀라 움찔하는 모습이 우스워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는데, 재희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공책 구석을 찌익 찢어 무언가를 끄적였다. 여름의 더위를 뿌리치기 위해 달달달 돌아가는 선풍기의 소음이나 간간히 소곤거리는 듯 긴장 풀려 떠드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한 교실에서 나누는 필담이었다. 재희가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톡톡 건드리자 얄팍한 종이가 팔락였다.
- 요즘 왜 면학실 안 가?
마침 왜 요즘 시원한 면학실에서 공부하지 않고 굳이 더운 교실로 내려가 공부를 하느냔 말을 들은 날이었다. 성적이 떨어진 건 아니니 면학실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담임선생에게 영주는 의연히 대답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집중해서 공부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나온 대답에 선생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서 면학실에서 짐을 전부 뺀 건 아니었으므로 선생은 좀 더 만족하는 듯했다. 영주는 공부를 잘했지만 딱히 대학에 뜻은 없었고 가면 가게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냥, 영주는 국어와 영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딱히 그것보다 더 잘하거나 좋아하는 게 없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재희는 공부를 그냥저냥 평범하게 했던 대신 글솜씨가 좋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어느새 자신의 공책에 정리된 필기를 구경하는 재희에게 공책을 밀어주고 영주는 그런 재희를 구경했다. 공부는 두 사람 모두 손 놓은 지 오래였고, 감독을 맡은 선생이 복도를 돌아다니지 않으니 교실에 남은 학생들도 조금씩 자세가 풀려가고 있었다. 아예 턱까지 괴고 공책이 무슨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구경하던 재희가 문득 고개를 들고 영주와 눈을 마주해왔다.
- 너는 칠판에 판서하면 웬만한 쌤들 다 이길 것 같아
- 무슨 소리야
- 진짜야. 너 선생님 해
키득키득 웃으며 재희가 옆에 놓인 공책을 가져와 필기를 어설프게 따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그래프 몇 개, 그 옆에 적힌 공식 몇 줄이 다였지만 영주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미소 띤 얼굴로 웃었다.
- 그럼 너는
- 나?
- 너는 작가 하면 될 것 같아.
너는 글을 잘 쓰니까. 영주의 말에 멍한 얼굴을 하던 재희가 뺨을 긁적였다. 나 글 못 쓰는데…… 말 끝을 흐리는 재희의 귀가 붉었다. 그럼에도 국어 시간에는 영주보다 더 집중하고, 국어 성적에 있어서는 자신과 일이 등을 다투는 일이 잦은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지 재희는 고마워, 하고 가볍게 대꾸하며 배시시 웃었다.
나중에 졸업하고 작가 돼서 책 내면 나도 읽을게.
그럼 우리 그때까지 못 봐?
응?
난 너랑 같은 대학 가고 싶은데.
필담이 답답했는지 재희가 툭 말을 던졌다. 이 성적에 네가 지망하는 대학 가면 완전 땡큐 아냐?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을 단정하게 할 수야 없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가볍게 말하는 재희에 말문이 막힌 영주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닌가? 어깨를 으쓱이며 재희가 영주의 공책을 톡톡 두드렸다. 순수한 마음과 순진한 눈빛을 계속 마주할 재간이 없어, 영주는 고개를 돌려 공책을 건드리는 재희의 손을 톡 건드렸다.
집중해.
응?
재희 너, 영주가 공부 가르쳐주는데 집중도 안 하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농담 섞인 타박이 떨어졌다. 영주는 그냥 웃어 보였고, 어안이 벙벙한 듯한 얼굴을 한 재희가 영주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선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언젠가가 떠오르는 모습에 영주는 모르는 척 형광색 포스트잇을 하나 떼어내 재희의 공책 위에 착 붙였다. 선생이 교실을 떠나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 재희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대박이다, 너. 영주는 그 말에 대답 없이 웃어 보였다. 뭐가 대박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익숙하게 느껴질 것 같은 이 더위가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