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그리고 소중한, 20221007
선생들의 감시가 사라지다시피 한 학기 말의 겨울, 재희와 영주는 커다란 담요를 한 몸인 것처럼 두르고 다녔다. 삼 년 내내 같은 반이었으니 나란히 앉아 그것을 크게 펼쳐 덮은 채 수업을 들었다. 물론 수능이 끝난 뒤인 만큼 수업의 기강은 해이해졌고, 비록 짝은 아니었지만 자리를 바꾸는 것쯤은 선생들이 눈 감아주는 편이었다. 영주는 그렇게 춥지 않다고 담요를 슬쩍 밀어냈으나, 재희가 아랑곳하지 않고 넓게 펼쳐 억지로 무릎에 덮어주는 게 서로 익숙해진 덕이었다.
재희는 영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영주는 어김없이 오늘도 소매를 잘라낸 교복 재킷 위에 외투를 걸친 채였다. 이 교실에서 영주가 가장 따뜻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 학생들을 쥐 잡듯 잡았던 '재킷 없는 교복 위 외투 착용 금지' 학칙은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소리를 내 흐지부지 된 학칙이 된 지 오래라 학생들은 마음 편하게 교복 위에 외투를 입었으나, 영주만은 꿋꿋하게 그 차림새를 고수했다.
어떻게 보면 꿋꿋하고, 어떻게 보면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듯 하지만 신념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영주는 성적이 높아지지도 낮아지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상위권이었고 묵묵했다. 그런 그를 굳이 싫어하는 학생은 없었다. 오히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영주는 어쩌면 그렇게 벽을 두르고 살아온 게 아닐까? 재희는 함부로 그를 판단했다. 분석하고 오인했다. 삼 년 동안 재희가 지켜봐 온 영주는 늘 그러했다.
이제 12월 중순이고, 이 시기조차 지난다면 영주와 만날 수 있을까, 재희는 생각했다. 영주와 재희는 이미 지망 대학을 서로에게 보여준 지 오래가 되었고 재희는 지망 대학이 단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어쩌면 성적 차이가 큰 만큼 당연한 것일 텐데도. 영주는 머리를 싸매고 공부 좀 더 해둘 걸, 하는 재희를 보며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었다.
- 재희야
조그마한 쪽지가 옆에서 툭 튀어나왔다. 재희는 곧장 그것을 받아 펼치고 그 부름에 영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어두워진 교실에 지루한 영화가 틀어진 채, 선생은 자리를 비웠는지 교실이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굳이 말로 해도 될 분위기에 굳이 쪽지를 건네는 게 우스워서 재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아래에 글자를 끼적였다.
- 왜?
- 이따 밥 먹고 운동장 돌 거야?
- 응 아마도?
왜? 재희가 입을 뻐끔거렸다. 영주는 한참 동안 재희를 마주 보고 눈을 끔뻑이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영주는 영화를 보기라도 하듯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린 채 턱을 괴었다. 물론 그게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재희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가끔 영주가 굳이 말을 하지 않고서, 혹은 말을 흐지부지해버리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을 재희는 자주 봐 왔다. 한 번쯤은 재희도 영주에게 물어볼 텐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영주가 재희에게만 유난히 그런 반응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재희는 선생이나 다른 친구들이 묻는 말에는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영주를 보고 마음이 상하기보다는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 속상하지만 괜찮아, 문제 있는 게 아니라면 됐어, 그런 안일하고도 평범한 마음으로 넘긴 지 삼 년이 흐르고 있었다. 일 학년, 입학하고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삼 학년, 어두운 교실에서 눈을 마주하지 않는 지금까지. 재희는 영주에게 묻지 않은 것이 많았다. 하다못해 그 흔한 '장래희망'조차도.
그래도 괜찮아, 나는……. 재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희는 정말로 괜찮았다.
재희야.
응?
이번에는 목소리가 담긴 부름이었다. 재희는 물에서 건져 올려지듯 상념에서 번뜩 깨어나 영주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영주는 재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영주가 시선을 알아채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재희는 이 시선과 위치가 조금 어색하고 민망해졌다. 그동안 얘는 어떻게 이 시선을 받아온 걸까. 직설적이고 때 묻지 않은 눈빛에 재희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겨우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왜? 하고 물었을 때에야 영주가 턱을 괸 채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영주는 가끔, 아니 어쩌면 자주 그런 눈을 하곤 했다. 부쩍 추워졌다고 묶고 다니던 것을 풀어놓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듯 흘러내리고, 재희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금 부산스럽게 상체를 움직였다. 왜 가끔 저런 눈을 하는지 몰랐다. 사람 속도 모르고. 정말로.
우리 오늘 점심 먹지 말자.
응?
우리 아예 도망가버리자.
그냥 조퇴해버리자는 거야. 영주의 마냥 해맑은 말에 재희의 말문이 막혔다. 이미 수시를 통해 대학에 붙은 친구들은 생활기록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무단으로 조퇴해버리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영주는 재희의 눈앞에 조퇴 확인증을 팔랑였다.
너도 조퇴증 받아서 와, 재희야.
왜?
그냥.
…….
한 번쯤은 그러자. 밖에 나가서 밥 먹고, 다른 애들처럼 교복 입고 돌아다니면서 수다 떨고…….
그러면 안 돼? 영주가 책상에 스르륵 엎드려 누우며 넌지시 물어왔다. 졸업이 코앞인데 너랑 해본 게 많이 없는 것 같아. 영주의 말에 재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웃는 얼굴에 홀려서. 결국 영주가 하향 지원으로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가게 될 줄도 모르고.
삼 년은 한순간이 아니다. 영주가 재희를 넌지시 부른 그 순간부터, 재희는 평생을 간직할 조그마한 시간을 고르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 삼 년을 고를 정도로 그에게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