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꿈을 꾼다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20220924

by 윤재영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심지가 단단하고 올곧은 목소리는 아득하고 먼 옛날의 기억에서 끄집어낸 듯 상냥했다.


영주는 때때로 꿈을 꿨다. 끄트머리가 군데군데 노랗게 물든 낡아빠진 벽지 위에 덕지덕지 붙인 영화 포스터 가장자리가 너덜거리는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습하고 쿰쿰한 공기가 뺨을 스칠 때에는 늘 그래 왔듯 선잠을 잤고, 얕은 수면의 경계에서 꿈을 꿨다. 무언가 보인다고 말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흐릿한 공간을 떠돌다가,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반짝 눈을 뜨는 그런 꿈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게 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는 눈물을 흘린다. 우는 것은 아니고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으니 슬픈 꿈을 꾼 것은 아니겠구나, 하며 정신없이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는 것이다. 예쁘게 수가 놓인 천에서 실밥을 하나씩 뜯어내는 듯한 간지러운 위태로움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느끼며, 이불 바깥 바닥에 발을 디딜 때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가며.


다정한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라거나 가장 친한 친구의 목소리라고 할 수도 없는, 정말로 부끄러울 만큼 부드러운 부름이었다.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고서 영주야, 하고 부르기만 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허공에서 들려온 지 몇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주가 몇 년 동안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 되었다.


영주야.

응.

나와서 밥 먹어.


그 부름에 작은 방에서 벗어나 그만큼 작은 거실에 놓인 밥상 앞에 앉는다.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는 하나씩 놓여 있었다. 영주는 맞은편을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떠다 놓은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과 뱃속을 적셔도 정신이 번쩍 든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언제 끓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상하기 직전인 된장찌개를 두고 밥에 남은 물을 붓는다. 흐물흐물한 김치나 나물 같은 것들을 대충 집어 먹으며 밥과 물과 국을 들이켰다.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주는 단숨에 그릇을 거의 비우며 집안을 무료하게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사는 집은 아주 좁아서 주방에서 한 발자국 걸으면 거실이었고 두 발자국 걸으면 또 작은 방이 두 개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 동네에서 이 값에 방이 두 개 딸린 집 찾기는 어렵다고, 가슴 쭉 펴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중개인의 얼굴을 한 번,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망설임 없이 계약한 집이었다. 언덕 중턱에 위치한 집은 오르기 어렵지 않아 집에 도착하고 나면 그렇게 지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근처의 어느 집보다도 낡은 티가 났다.


영주는 마치 그 집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집이 싫은 것은 아니고 또 구질구질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늘 축 쳐져있다고 느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흐느적거리는 몸, 발에 쩍쩍 달라붙는 바닥, 노란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툭 꺼져버리는 현관의 센서 같은 것들. 집이 싫지는 않다. 낡음이 주는 운치 따위는 몰랐지만 하루에 두 끼 먹을 수 있고 미지근한 물로 씻을 수 있고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닥에 누워서 잘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그릇이나 수저들을 작은 싱크대로 가져와 간단하게 설거지를 하고 나면 뒤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기척이 있었다. 언젠가 저 팔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아주었던 것 같은데, 하고 영주는 세제 거품이 묻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스산하지 않은 그 인기척은 무엇보다도 든든했으며 또 어떤 것보다도 영주를 외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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