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고 맹숭맹숭한 결별이었다. 재희는 무감각한 낯으로 작은 화면에 도착한 누군가의 당부―혹은 저주―를 내려다보다가 핸드폰 화면을 까맣게 죽였다. 어차피 드문 일도 아니었다. 문장부호 하나 붙지 않은 메시지는 분노로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모든 기대를 태워버린 체념을 닮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쉽다고 재희는 늘 생각해왔다. 그게 이름이라는 껍데기뿐인 감정이라서 더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들 말했지만 재희는 그 말에 동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단 한 번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니게 되고, 말 한마디에도 전전긍긍하게 되며, 모든 것에 어쩔 줄 몰라하게 되는. 가장 숭고한 존재를 바라보는 가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느낌.
신앙과 사랑은 자음 두 개와 모음 한 개를 공유하기만 할 뿐 엄연히 다른 것일 텐데도, 실제로 몸소 겪고 나면 그저 한 끗 차이였다.
재희는 바람맞은 카페에서 일어나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넓게만 느껴지는 집은 도무지 익숙해질라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차갑게 식은 바닥을 양말 신은 발로 딛다가 양말을 주섬주섬 벗어 세탁물 통에 던져 넣고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외출복 입고 침대에 눕지 말라던 누군가의 잔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신앙과도 같은 사랑을 했던 때가 있었다. 같은 것 하나도 없이, 정확히 반대된다는 존재가 이런 것일까 싶을 만큼 다른 사람과 사랑을 했다. 매일매일이 다툼의 연속이었지만 그래서 이따금 딱 하나가 맞을 때 그렇게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재희는 멍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날을 되새겼다. 낡고 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듯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지 오래인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가득 들어차는 사각형 모양 천장이 전부인 그의 세상이었지만. 어쨌든.
언젠가 훌쩍 떠나버린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덤덤하게 멀어지듯 헤어졌던 요 최근의 숱한 이별들과 비교하자면, 그날의 이별은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았다. 원래도 쉽지 않은 연애였어서 더 그랬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소리를 지르고, 어깨를 밀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마지막에는 울부짖음과 함께 멀어지는 걸음이 있었다. 평소에도 지겹도록 다투었으니 그 멀어짐 직전의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재희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사흘, 나흘, 일주일,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연락 없이 깜깜하게 죽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그날을 떠올리다가 문득 자각했다. 아, 우리 헤어졌구나.
그뿐이었다. 가끔 울리지 않는 도어록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었고 밥그릇을 식탁 위에 두 개 올려둘 때가 있었지만, 정말로 그뿐이었다. 첫 연애, 첫 이별에서 재희는 상실 따위 겪지 않았다. 재희는 잃은 것이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