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눈빛이 영주를 스치는 순간

눈치채지 못할 때 그것은 칼날이 된다, 20220926

by 윤재영

뜨겁게 달아오른 피처를 내려놓는다. 우유 거품의 잔해를 남긴 그것의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영주는 사장이 눈치 주는 것을 보지 못한 척 스팀 피처를 개수대로 가져가 물로 헹구어냈다. 밀려가는 주문에 결국 사장이 영주의 어깨를 밀치고 물기가 흥건한 피처에 우유를 들이부었다. 여기저기로 튀는 흰 우유 방울들을 멀거니 바라보던 영주는 깨끗하게 씻은 딸기 꼭지를 떼어냈다.


고소한 원두와 달콤한 과일 냄새가 풍기는 카페는 언제나 바빴고, 영주는 그곳에서 한 발 멀어져 관망하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잘 알던 지인에게서 소개받아 고용한 탓에, 어찌 보면 늑장을 부리는 듯 여유로운 영주를 답답해하면서도 사장은 그를 내치지 못했다. 사이가 껄끄러워지는 것은 사장도 반기지 않는 입장이었고, 그를 차치하고서도 영주의 손끝이 야무져 그의 손이 지나가는 곳은 항상 말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장은 커다란 블렌더 두 개를 씻어 물기를 털어내는 영주를 바라보며 영수증을 정리하다 문득 떠올렸다. 분명 재작년까지의 영주는 글을 쓴다고 노트북을 들고 다녔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영주의 모습에서는 노트북은커녕 책 한 권 찾아볼 수 없었다. 핸드폰, 손수건, 기껏 해봐야 낡은 줄 이어폰과 조그마한 수첩이었다. 그때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것도.


물론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심심찮게, 그리고 의도치 않게 구경하게 되는 것이 연인의 이별이다. 사장은 곁눈질로 영주를 힐끔 바라보다가 곧 물어보기를 관두었다. 조금 삐그덕거리는 게 느껴질 만큼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굳이 물어서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사적으로 많이 친해지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일지도 몰랐다. 그의 시선을 모두 받아내는 영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물기 가신 컵들을 깨끗한 행주로 닦아내어 선반 위에 올렸다.


영주의 팔에는 작은 강아지 발바닥이 살았다. 영주가 드물게 웃으며 사장에게 처음으로 자랑한 타투이기도 했다. 어날 때부터 작았던 강아지가 떠나기 전에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던 조그맣고 까만 발바닥은 영주가 선반처럼 높을 곳으로 팔을 올릴 때 소매 틈으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러 고개를 틀어서 보려고 해야만 보이는, 그런 아주 작은 타투였다. 지금처럼 파우더니 재료니 바쁘게 정리하는 영주의 팔뚝을 강아지 발바닥이 정신없이 뛰어놀았다.


"영주야."

"네?"

"원두랑 얼음 다 떨어져서 지금 마감 준비할 거니까, 파우더 뚜껑만 닦고 오늘은 퇴근해."


닦아야 하는 파우더 뚜껑만 족히 스무 개는 되었지만 영주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감 준비를 할 때 늘 해왔던 일이니 오히려 영주에게는 덜 피곤하고,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사장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금 신경질적이게 보이는 손으로 대충 묶어 올리고 물기를 꼭 짠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유리문에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안내문을 붙여두고 가게의 불을 조금 어둡게 해 두니, 더 들어오는 손님은 없었다.


정신없이 바닥을 닦고 누가 언제 흘렸는지 모를 음료의 흔적을 훔쳐내던 사장은 문득 카운터에 선 영주를 바라보았다. 파우더 통을 전부 닦고 시키지도 않은 선반의 먼지까지 닦아낸 영주가 작게 열린 창문 틈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깨에 닿아서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단정하고, 영주의 어깨는 어쩐지 조금 쳐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기분 탓인지, 그저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영주의 자세 탓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장은 어쩐지 다급한 마음에 카운터로 들어가 영주의 팔뚝을 잡았다. 어깨를 조금 떨며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에 놀람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어쩐지 마음이 쿡쿡 쑤셔오자, 사장은 공연히 고개를 까딱여보이며 퇴근하라고 일렀다. 손바닥에 닿았던 온기에 작은 강아지가 뛰어노는 것만 같았다.


"내일 뵐게요."

"응."


그제야 사장은 기억해냈다. 영주의 핸드폰 속, 강아지 발바닥에 코를 박고 행복하게 웃었던 다른 사람의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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