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의 발아래

유리조각을 밟아도 다치지 않은 사람처럼, 20220927

by 윤재영

반차를 내고 탐탁지 않아하는 상사를 뒤로한 채 사무실을 나오자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봄날에 놀러 갈 것이 분명한 주제에 사유란에 '병원 내원'을 기재한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는지, 곽 차장은 티 나도록 혀를 쯧 차며 의자에 신경질적으로 주저앉았다. 곁에 앉은 두 명의 대리와 한 명의 주임이 눈치를 보며 키보드가 불티나게 눌리는 것을 무시한 채였다. 재희의 핸드폰에 '푹 쉬시구 내일 봬요!' 하고 말하는 메시지와 함께 귀여운 이모티콘이 하나 도착했다. 동기들이 상사를 욕하느라 불이 났던 사내 메신저 어플은 사무실을 나오며 종료해버렸으니, 금요일 오후인 지금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잠잠할 것이다.


날이 따뜻할 것 같아 두꺼운 가디건은 두고 셔츠에 얇은 자켓만 챙겨 입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미 길을 가는 사람들 중 몇몇은 소매가 짧은 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봄날의 풍경은 서늘하게 부는 바람을 무시하도록 할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재희는 습관처럼 카페로 발을 돌리려다가 버스 두 정거장 거리의 병원으로 향했다.


창 밖으로 자신과 같이 반차를 낸 것인지, 아예 처음부터 연차를 낸 것인지 기분 좋은 티가 나는 직장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그들 틈에 섞여 꽃구경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평일의 정오로부터 두 시간 지난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버스는 사람이 제법 차 있었다. 퇴근 시간대에 길이 더 막히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재희는 하차벨을 눌러 버스에서 내렸다.


예약했는데요, 하고 운을 띄우며 병원 원무과 직원에게 말을 건네고 구석 자리에 선다. 병원마저 사람이 많았다. 넓은 대기실을 꽉 채우고도 앉지 못한 사람들은 재희처럼 서성거리거나 여기저기 구비된 책자를 읽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조금 멀어진 채로 가만히 서 있자니 근처의 텔레비전에서 틀어둔 영상의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쏟아지는 햇빛과 나긋나긋한 성우의 목소리에 자꾸만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언어들. 귀를 타고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말들은 단어와 호흡의 혼합물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저마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함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제각각으로 대기실의 숨을 공유하고 있었다.


재희도 그중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꼬박꼬박 찾아와 이제는 벽지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대기실을 오가던 선생 한 명이 재희를 보고도 아는 체를 하기보다는 그저 고개만 꾸벅 숙여 보이고 지나갈 뿐인,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환자 A라기보다는 벽지 조각 하나. 그 정도였다.


"재희 님."


그 이후로는 늘 해왔던 진료와 같았다. 어느 것도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잠은 잘 주무셨나요? 아니요, 잠을 좀 설치게 돼요. 얼마나 그러셨어요? 한 나흘 됐어요. 식사는 하시고요? 입맛 없어서…… 그래도 못해도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먹어요. 의사는 꼼꼼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재희의 말을 받아 적었다. 오늘도 똑같이 가벼운 약 처방과 함께 진료는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슬픔을 덜 느끼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해 봅시다."


항상 진료는 그런 말과 함께 끝이 났으며, 재희는 항상 똑같이 고개를 꾸벅이며 진료실을 나섰다. 그는 슬프다고 느끼지 않았음에도, 그저 고개를 주억이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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