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20220929
딱히 어떤 중요한 날도 아니었다. 가끔 그러고 싶은 날이 있어서, 재희는 아침 일찍 일어나 굴러다니는 양상추 따위의 야채를 손질하고 깨끗이 씻어 물기를 털었다. 키위를 손으로 으깨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요거트를 섞어 드레싱처럼 뿌려 먹은 뒤 커피를 내려놓고 깨끗하게 샤워했다. 머릿속에 어떤 상념도 남아있지 않은 말 그대로 무(無)의 상태였는데, 그는 모든 생각을 떨쳐내려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뜨거운 김이 가득 찬 욕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재희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꼭 짜고 나와서 한 김 식은 커피를 차가운 물에 부어 마시고는 곧장 집을 가로질러 옷장 문을 열었다. 출근할 때에는 입지 않는 블라우스와 입으면 허리가 갑갑한 바지를 꺼낸다. 회사를 다니기 위해 입는 옷은 그저 깔끔하고 편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이런 날에는 조금 불편한 옷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머리는 다 마르지 않아 가닥가닥 뭉쳐있는 상태에서 엷은 화장을 입힌 얼굴은 어딘가 조금 어색해 보였다. 공연히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고 손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다.
피부에 닿는 모든 감각이 어딘가 조금 낯설었다. 재희는 이렇듯 화장대 앞에 앉을 때마다 항상 그런 위화감을 느꼈다.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다리, 깨끗한 옷,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낡고 초라한 화장대. 누군가 쓰다가 버린 것처럼, 아니, 누군가 애착을 느끼며 쓰다가 물려준 것인 화장대. 물론 그 전 주인은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머리를 다 말리고 몇 번 만져보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민망한 마음에 코를 훌쩍인 재희가 손에 핸드크림을 꼼꼼하게 바르고 가방을 들었다. 평소와 비슷한 모양새인데 어딘가 조금 차려입은 것처럼 보이고, 재희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부터 그랬다. 단정한 새 스니커즈를 신은 발 뒤꿈치가 조금 불편했다.
정처 없이 걸어서 도착한 곳은 평소에 잘 가지 않는 조그마한 카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셨으니 카페에서는 따뜻한 허브차를 주문해 마셨다. 핸드폰도, 책도, 노트북도 없이 그저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은 재희가 유일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홀로 다섯 배 느린 시간을 살아가는 아날로그 인간이 된 것처럼, 재희의 시간만이 느긋하게 흐르고 있었다. 무거운 머그잔 안에 따뜻하게 식은 티백만 남을 때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킨 재희는, 카페에 들어섰을 때처럼 조용히 자리를 떴다.
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동네와 마주하게 되었다. 가정집이 즐비한 주택가를 조금 지나면 널따란 길이 나오고, 그렇게 또 한참을 걷다가 화방과 마주쳤다. 재희는 미술 작품이라거나 사진이라거나, 그런 시각적으로 직접 보이는 예술을 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도록 살아왔지만 그럴 때에는 그 조그맣고 낡은 화방에 꼭 발을 들이고 싶게 되었다. 바쁜 일상에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화방은 어딘가 발걸음을 이끄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먼지 냄새와 어딘가 낯선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찾는 거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화방에 발을 들이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낡은 체크 셔츠를 입은 학생이 안쪽 창고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재희는 조금 당황해서 고개까지 살살 젓다가, 그의 대답에 관심을 떨쳐낸 학생이 다시 창고 안쪽으로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낯선 사람과 마주해도 잘 긴장하지 않는 편인데도 그랬다. 결국 먼지와 함께 이것저것 켜켜이 쌓여있는 여러 재료들 사이를 구경하다가, 재희는 연도 없는 조그마한 캔버스를 집어 들어 값을 지불하고 나왔다. 가로와 세로가 각 15센티는 될까 말까 한 조그마한 캔버스였다.
가방에 캔버스를 밀어 넣고 화방을 나왔다. 뒤에서 캔버스 값을 받은 학생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벌써 점심 즈음이었다. 이런 쉴 시간이 생기는 날에 봐야지, 하고 예전에 찾아두었던 전시회들은 이미 시간이 다 지나버렸고, 낯선 동네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저마다 갈 길을 걷고 있었다.
동네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재희는 동네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그저 집과 골목과 건물들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바쁘게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재희는 그 안에서 온전히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걸음을 서둘렀다. 모든 게 꿈속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같았다.
그리고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챈 것은 건너 동네, 익숙한 골목길에 발을 들이고 나서였다.
이 동네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몇 년이고, 이 동네에 발을 들였다가 도망치듯 떠난 것도 몇 번인지 재희는 헤아릴 수 없었다. 동네는 변한 곳도, 변하지 않은 곳도 많았다. 담벼락에 새겨져 있던 낙서는 어느새 새로 칠해진 지 오래인 듯 보였고 100년은 거뜬히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미용실이 임대문의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를 써놓은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며 서성일 때 시간은 세 시였다. 작지 않은 동네여서 그런지 알고 있던 곳이든, 새로 허물고 지어서 모르는 곳이든 쏘다니다 보면 항상 이렇게 시간이 훌쩍 달려 지나버리곤 했다. 두어 달 전에 왔을 때에도, 반년 전에 왔을 때에도, 일 년 전에 왔을 때에도 항상 그랬다. 재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익숙한 회색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주택을 따라 걷다가 원룸이 즐비한 작은 단지를 가로지르고, 작고 낮은 아파트 단지 앞에서 서성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파트 앞에서 머뭇거리고 낡은 놀이터를 배회하다가 의심하는 듯한 몇몇 사람들의 눈빛에 쫓겨나듯 동네의 구석으로 향했다. 재희가 아는 사람들은 더 동네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시큰거리는 발 뒤꿈치를 스니커즈 밖으로 몇 번 매만지다가 어깨에 조금 힘이 빠진 채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낯섦이 더 느껴지는 동네를 벗어나 재희의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내내 물에 잠겨있던 몸이 건져지는 것처럼, 재희는 어딘가 갑갑한 해방감을 느꼈다.
괜히 꾸며서 아픈 발과 간지러운 얼굴, 갑갑한 배. 머뭇거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와 버린 쓸쓸한 하루. 익숙한 건물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재희는 얼굴에서 한 겹씩 표정을 지우고, 마침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재희는 비로소, 꿈같은 현실에서부터 지극히 생생한 현실로 돌아왔음을 인정했다.